ADVERTISEMENT
오피니언 황정근의 시대공감

개헌 논의 출발점은 인권신장이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때는 1987년 6월 10일 저녁.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은 그날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기쁨에 젖어 힐튼호텔 축하연에 가고 있었다. 간선제하에서 집권당 후보가 됐으니 차기 대통령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그는 기쁨에 전율하며 차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승용차는 서울역을 지나치고 있었다. 이게 웬일인가.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과 시위를 진압하는 전경의 대치 속에 최루탄 가스가 가득했다. 호헌 철폐와 민주화를 외치는 6·10 민주항쟁의 시작이었다. 그는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자신이 좀 전에 느꼈던 기쁨이 허위일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압박감을 느꼈다.

2주일이 지난 6월 24일, 노 대표는 전두환 대통령과 그의 장남을 만났다.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흐름 앞에 봉착한 것을 알게 됐다. 노 대표는 연희동으로 돌아가 닷새 동안 칩거한 후 6월 29일 아침에 눈을 떴다. 먹을 갈아 붓으로 이순신의 필사즉생(必死卽生)을 썼다. 그리고 민정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국민 대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을 낭독한다. 바로 6·29선언이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을 골자로 한 8개항의 민주개혁 방안이다.

1987년 6월 29일, 지금으로부터 꼭 27년 전 오늘이다. 소공동 찻집 ‘가화’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걸렸다. “오늘은 기쁜 날, 찻값을 받지 않습니다.”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겠다는 민심에 굴복한 항장(降將)의 항복 선언이든, 강자의 자발적 양보든 16년 만에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됐다. 그날은 모두에게 기쁜 날이었다.

나는 그 즈음 법무장교로 동해 함대사령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여당은 내각책임제를, 야당 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하고 있었다. 국회에 개헌특위(헌특)가 있었지만 여야 합의는 지지부진했다. 나는 군법교육을 하면서 수병들에게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6·29선언이 당도한 것이다. 이제 수병들에게 총리제와 대통령제에 대해 교육할 필요가 없어졌다. 나는 전역 후 민주화된 나라의 판사가 될 수 있다는 안도감에 더욱 기뻤다. 10월 27일 국민투표에서 93.1% 찬성으로 개헌안이 통과됐다.

6·29선언 27주년이 된 오늘, 한국 민주주의는 이제 불가역적(不可逆的)이다. 대한민국은 모호하게 중앙선으로 가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민주주의의 길을 달리고 있다. 10년 후 1997년, 20년 후 2007년, 새뮤얼 헌팅턴이 말한 민주주의 공고화 기준인 ‘두 번의 정권교체 테스트’를 통과했다. 불과 20년 만에 선진형 민주주의에 진입한 것이다.

‘1987년 헌법’이 탄생시킨 최고의 명품은 1988년 9월에 출범한 헌법재판소다. 헌재는 그동안 법전 속의 장식과도 같은 헌법을 재판규범·생활규범으로 만들었다. 외국에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법률에 대해 위헌 선언을 했다. 헌정체제 내에서 국민의 기본권 보장 및 헌법 수호 기관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지금껏 쌓아온 헌법 판례의 보편성과 특수성·독자성은 선진 외국에서도 크게 주목 받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의 노하우와 독자적인 판례이론을 외국에 수출까지 하고 있다.

현행 헌법 시행 30년(2017년)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일각에서 개헌 논의가 일고 있다. 개헌이 국가 대개조의 근본적 출발점이 돼야 한다거나 제왕적 대통령 5년 단임제를 고쳐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개헌 논의에서 핵심은 권력구조보다 국민의 기본권 분야다. 권력구조 개편을 내세워서는 개헌이 시작되기 어렵다. 헌재가 정립한 인권에 관한 판례를 반영하고 국민의 알 권리, 안전권, 잊혀질 권리, 배심재판을 받을 권리, 청렴의무와 같이 시대정신에 걸맞은 새로운 기본권을 헌법에 넣어야 한다. 인권의 신장이야말로 개헌을 해야 할 본질적 이유다.

그렇다고 개헌이 어렵고 힘들지만은 않다. 6·29선언 후의 개헌 과정에서처럼 단기간 내에 여야 합의 개헌을 하면 가능하다. 6·29선언 후 불과 두 달 만에 여야 ‘8인 정치회담’은 개헌 초안을 완성했다. 그해 10월 국회 의결과 국민투표까지 모두 마쳤다. 앞으로 개헌을 할 때, 그때와 같이 국회에 ‘헌특’을 설치하고 여야 동수의 ‘8인 정치회담’을 통해 합의 개헌을 해야 한다. 하나만 더하자면 ‘통일 준비 체제의 수립’이라는 비전도 헌법에 보다 구체적으로 담아내야 한다. 개헌론이 아직은 잠복해 있지만 시대가 변하면 헌법도 불변일 수는 없다.

황정근 변호사

오피니언리더의 일요신문 중앙SUNDAY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아이폰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아이패드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 폰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 탭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앱스토어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마켓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