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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왕 때의 순수비 확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최근 발견된 중원 고구려비는 고구려 문자왕 세운 순수비임이 거의 확실해졌다.
단국대 중원고구려비 제2차 조사단은 22일 비석이 보관되어 있는 충북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에서 30여 전문학자들의 비문 공동판독 작업 끝에 이 같은 결론에 접근을 보았다.
조사단의 정영호 교수(단국대 박물관장)는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면서 비문의 첫머리를 『오월중고려대왕단왕』으로 봄으로써 『고구려왕 문자왕의 할아버지이신 왕』이 바로 장수왕이므로『문자왕 때 만들어진 비석임을 확신케 한다』고 설명했다.
이병훈 박사(학술원 회장)도 그 점을 확인하면서 비문내용이 대체로 처음에 신라와 고구려가 평화·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있던 때를 이야기하고 후반에 가서『백제 개로왕이 신라와 공모하여 신라영토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 신라사이가 몹시 나빠지는 얘기가 실려있다.
바로 이 때가 장수왕 말년이며 역사기록에도 부합된다고 했다.
당시 백제 개로왕은 신라에 원병을 청했으며, 신라와 함께 고구려에 대항하려했으나 신라의 원병이 이르기 전에 백제의 57개성이 고구려 군에 함락되고 개로왕도 목숨을 잃었다고 「삼국사기」등은 기록한다.
따라서 이 박사는 이 비가『을축년 5월중에 고구려대왕(문자왕)의 할아버지 왕(장수왕)이 볼모로 있던 신라왕을 돌려보내면서 오래 형제지국이 되기를 원했다』고 시작되는 문자왕순수비의 성격이 짙다고 해석했다.
차문섭 교수(단국대)도 이에 대체로 동조하면서도 문자왕이 직접 이 지역을 순수했다기보다는 태자 공이 그 밖의 관인을 이끌고 온 것 같다고 풀이했다.
그러나 이기백 교수(서강대)는 문자왕으로 단정하지 않고 『고구려가 신라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했던 장수왕 이후부터 고구려 세력이 묻어나게 된 시기까지 사이에 세워진 것만은 분명하다』고 했다.
이 교수는 또 ①당초『고려대왕상왕공』으로 있었을 때는 『왕 밑의 상왕공』으로 읽었으나 임창순·김응현 씨가 『고려대왕조왕』으로 밝힘으로써 현저하게 뜻이 달라졌다. ②비석우면에서 글자가 확인됨으로써 비문은 이른바 전면의「오월중」으로 시작되지 않는다는 기왕의 확신을 다짐하게 됐다. 또 뒷면에도 글자가 있으리란 기대다. ③『여형여제 상하상화』 라는 글이 해독됨으로써 고구려 신라관계가 새롭게 인식되었다. ④이미 주장한대로 비석전면이 10행23자이고 좌면은 맨 뒤 6자 분이 공백인 것 외엔 7행23자, 우면도 6행23자쯤으로 볼 수 있으며 ⑥동이매금이 신라왕을 지칭한 것임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조사단은 전면에 비액에 해당하는 본 글자 5자 등 5백28자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으나 전면에서 1백96자, 좌면에서 50자, 우면에서 6자 등 2백52자를 가려 읽었을 뿐이다.
이번에 비석의 우면에서「석·대·소」등 글자가 확인됨에 따라 이 비의 4면 모두에 글자를 새겼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기백·석수영·김응현 씨 등은 그 점을 인정하면서 비문이 이른바 전면의 「5월중」으로부터 시작될 수 없다고 했다. 또 배면에 비명에 해당하는 글자가 있을 가능성도 지적되었다.(김응현)
비문의 글자체에 대해서는 김응현 씨는 광개토 대왕비와 유사한 예서체라고 주장한 반면 임창순 씨는 해서로 봐야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논의는 하루 이틀에 해결될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조사단은 5월 하순께 학술회의를 갖고 그간의 연구를 토대로 연구보고서를 작성, 우선 정부에 이 비의 국보 지정을 요청 할 예정이며, 정부의 지원을 받아 특수한 보호시설을 갖출 계획이다.【충주=공종원·김현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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