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견된 중원 고구려비는 고구려 문자왕 세운 순수비임이 거의 확실해졌다.
단국대 중원고구려비 제2차 조사단은 22일 비석이 보관되어 있는 충북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에서 30여 전문학자들의 비문 공동판독 작업 끝에 이 같은 결론에 접근을 보았다.
조사단의 정영호 교수(단국대 박물관장)는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면서 비문의 첫머리를 『오월중고려대왕단왕』으로 봄으로써 『고구려왕 문자왕의 할아버지이신 왕』이 바로 장수왕이므로『문자왕 때 만들어진 비석임을 확신케 한다』고 설명했다.
이병훈 박사(학술원 회장)도 그 점을 확인하면서 비문내용이 대체로 처음에 신라와 고구려가 평화·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있던 때를 이야기하고 후반에 가서『백제 개로왕이 신라와 공모하여 신라영토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 신라사이가 몹시 나빠지는 얘기가 실려있다.
바로 이 때가 장수왕 말년이며 역사기록에도 부합된다고 했다.
당시 백제 개로왕은 신라에 원병을 청했으며, 신라와 함께 고구려에 대항하려했으나 신라의 원병이 이르기 전에 백제의 57개성이 고구려 군에 함락되고 개로왕도 목숨을 잃었다고 「삼국사기」등은 기록한다.
따라서 이 박사는 이 비가『을축년 5월중에 고구려대왕(문자왕)의 할아버지 왕(장수왕)이 볼모로 있던 신라왕을 돌려보내면서 오래 형제지국이 되기를 원했다』고 시작되는 문자왕순수비의 성격이 짙다고 해석했다.
차문섭 교수(단국대)도 이에 대체로 동조하면서도 문자왕이 직접 이 지역을 순수했다기보다는 태자 공이 그 밖의 관인을 이끌고 온 것 같다고 풀이했다.
그러나 이기백 교수(서강대)는 문자왕으로 단정하지 않고 『고구려가 신라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했던 장수왕 이후부터 고구려 세력이 묻어나게 된 시기까지 사이에 세워진 것만은 분명하다』고 했다.
이 교수는 또 ①당초『고려대왕상왕공』으로 있었을 때는 『왕 밑의 상왕공』으로 읽었으나 임창순·김응현 씨가 『고려대왕조왕』으로 밝힘으로써 현저하게 뜻이 달라졌다. ②비석우면에서 글자가 확인됨으로써 비문은 이른바 전면의「오월중」으로 시작되지 않는다는 기왕의 확신을 다짐하게 됐다. 또 뒷면에도 글자가 있으리란 기대다. ③『여형여제 상하상화』 라는 글이 해독됨으로써 고구려 신라관계가 새롭게 인식되었다. ④이미 주장한대로 비석전면이 10행23자이고 좌면은 맨 뒤 6자 분이 공백인 것 외엔 7행23자, 우면도 6행23자쯤으로 볼 수 있으며 ⑥동이매금이 신라왕을 지칭한 것임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조사단은 전면에 비액에 해당하는 본 글자 5자 등 5백28자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으나 전면에서 1백96자, 좌면에서 50자, 우면에서 6자 등 2백52자를 가려 읽었을 뿐이다.
이번에 비석의 우면에서「석·대·소」등 글자가 확인됨에 따라 이 비의 4면 모두에 글자를 새겼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기백·석수영·김응현 씨 등은 그 점을 인정하면서 비문이 이른바 전면의 「5월중」으로부터 시작될 수 없다고 했다. 또 배면에 비명에 해당하는 글자가 있을 가능성도 지적되었다.(김응현)
비문의 글자체에 대해서는 김응현 씨는 광개토 대왕비와 유사한 예서체라고 주장한 반면 임창순 씨는 해서로 봐야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논의는 하루 이틀에 해결될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조사단은 5월 하순께 학술회의를 갖고 그간의 연구를 토대로 연구보고서를 작성, 우선 정부에 이 비의 국보 지정을 요청 할 예정이며, 정부의 지원을 받아 특수한 보호시설을 갖출 계획이다.【충주=공종원·김현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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