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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 기자는 고은맘] '영사'를 멀리하라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할머니 찬스’ 써서 득템한 모자. 일본 애니메이션 <토토로>에 나온 동생 ‘메이’를 닮은 고은양.

‘영사(영업사원)를 멀리하라’

육아 선배 친구가 해 준 말입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은 흔들리는 ‘팔랑귀’ 엄마랑 달리, 육아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 있는 친구입니다. 제가 아무 생각 없이 맞추던 예방접종도 (설명을 해 주긴 했는데 잘 기억이 나진 않네요ㅠ) 부작용을 우려해 한 번도 안 맞췄다는 친구죠. 올 여름 아들 쌍둥이를 출산할 예정이어서, 조만간 ‘애셋매니저(아이를 세 명 둔 부모)’의 길을 가게 됐습니다.

‘육아 9단’인 그 친구가 고은양 출산 이후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줬습니다. 무척 좋은 말을 많이 해 준 것 같은데 생각나는 강력한 말은 두 가지밖에 없네요. 그 중 하나가 ‘영사를 멀리하라’ 입니다. (다른 하나는 ‘조리원 동기를 멀리하라’ 입니다. 그런데 오늘 조리원 동기 모임이 있습니다.)

영사는 영업사원이 줄임말입니다. 프뢰벨, 몬테소리 등 영유아 교육 교제를 파는 영업사원들 말입니다. 친구에 따르면 아파트 놀이터나 백화점 문센(문화센터)에 유모차 끌고 가면 어김없이 영사가 접근한다는 겁니다. 그 분들 얘기를 듣고 있으면 우리 아이만 경쟁에서 뒤처지는 거 아닌가 불안하고, 그 불안감에 아이에게 비싼 교제 세트를 안기게 되고. 이것도 해야 할 것 같고 저것도 해야 할 것 같고, 엄마의 불안감 때문에 하나하나 사 모으다 보면 끝이 없고. 결국, 돌도 안 지난 아기 교육비 때문에 허리가 휠 정도가 된다는 거죠. 아이가 별 관심도 없어 구석에 처박히게 될 물건에 말이죠.

선글라스도 할머니 찬스를 쓰고 싶었지만 너무 커서 포기.

한 달 전쯤인가 문센에 갔다가 드디어 영사를 만났습니다. 아이가 몇 개월이냐며 명함을 건네는데 F사 영사분이었습니다. 귀찮게 안 할 테니 자료만 보내주겠다고 전화번호랑 주소를 물어봅니다. 친구의 경고가 떠올라 겁이 났지만, 겁보다는 호기심이 더 큰 터라 알려뒀습니다.

그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자료가 배달됐습니다. 두뇌 발달이 폭발적으로 형성되는 영아기에 효과적으로 교육을 해야 커서 머리 좋은 아이가 되고 공부를 잘한다, 책 읽는 습관도 이때부터 만들어 줘야 한다, 는 등의 저처럼 아무 체계 없이 놀아주기만 하는 부모의 불안감을 자극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유명 저널에 실린 박사의 논문과 서울대 교육연구소의 연구 결과 등을 언급하면서, F사의 교제가 꼭 필요하다는 거였죠.

그리고 2주가 지났을 무렵 전화가 왔습니다. 집으로 와서 자세히 설명해 주겠다고. 자료와 함께 배달된 공짜 포스터까지 챙긴지라 마냥 거절하기 미안했습니다. ‘내 절대 계약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약속을 정했습니다.

문제의 방문일엔 문센에서 만난 영사 말고 팀장급으로 보이는 아줌마 한 분이 더 오셨습니다. 설명은 그 팀장님이 주로 하셨죠.

청산유수입니다. 무척 많은 설명을 들었지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뇌에는 수천 수만 개의 신경세포가 있는데 그게 돌 전에 시냅스로 연결된다, 이때 두뇌발달을 촉진하는 F사 교제 세트로 두뇌를 자극하면 시냅스 연결을 촉진해 아기 머리가 좋아진다,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고 책 보는 습관을 들일 수 있다, 어차피 책 사줄 거 아니냐 따로따로 사면 체계도 없고, 이 책 세트는 서울대와 함께 개발한 검증된 제품이다, 아기들이 책을 물고 빠는데 이 책은 그것에 대비해 AS도 해 준다, 게다가 엄마들이 책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소액만 내면 선생님을 집으로 부를 수도 있다, 등등. 장점을 쉼없이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중간 중간 빠트리지 않고 고은양 칭찬을 하더군요. 고은양은 낯선 사람을 보면 빤히 쳐다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고은양이 이 팀장을 빤히 쳐다보니, 그 분은 “고은이는 집중력이 좋네요. 이런 아기한테 영아다중(F사 교제 세트)해 주면 커서 공부 잘 하게 돼요” 라고 하더군요. 또 “선생님은 보통 8개월부터 부르는데 고은이(7개월)는 지금 당장 불러도 수업이 되겠어요” 라며 고은양 발달이 빠르다고 하고요. 조금 설명이 막힌다, 지루하다 싶으면 고은양 칭찬을 합니다. 고은양이 남다르게 영특하다고. 이런 아기는 영아다중을 하면 효과를 크게 본다고. (이 얘길 들은 친구는 “그건 마치 과외 모집 광고에 가장 효과적인 구절 ‘머리는 좋으나 공부 방법을 몰라 성적이 나쁜 학생에게 추천합니다’와 같다”고 정리하더군요)

문제는 가격. 책 30권 및 교구 CD DVD 등 풀세트가 59만8000원. 책은 완전 얇고 교구는 원가가 얼마나 들었을까 싶은데 말이죠. 게다가 그 30권 중에서 7권은 새언니가 줘서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새언니에게서 영아다중 책을 몇 권 받았다고 했더니 그 팀장님은 “새언니가 영아다중 추천하죠? 해 보신 분들은 다 추천해요”라고 하시네요. “아, 네” 어색하게 답했지만 실상은 전혀 아닙니다. 새언니는 책을 여기저기 주고 남은 게 별로 없다며 몇 권을 챙겨주면서 “가격이 제가 샀을 때보다 엄청 올랐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비싸요. 굳이 살 필요 없어요” 라고 말했거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애를 어렸을 적부터 힘들게 하나, 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엄마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게 더 교육적이다, (운명 결정론자는 아니지만) 이러니 저리니 해도 인생은 ‘닥디(닥치고 DNA)’ 아니냐, 라고요.

엄마야, 문제는 맛이야. 더 달라고 입을 벌리는 고구마 미음.

영사분들의 꼬임에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상의해 본다며 이분들을 돌려보냈습니다. 빈손으로 가게 해서 미안했지만, 가격이 너무 ‘후덜덜’ 합니다. 이것저것 그럴 듯한 이유를 대는 것도 실은 ‘신포도’ 심리겠죠.

나중에 (친구가 어울리지 말라던 ㅠ) 조리원 모임에 얘기했더니 어떤 엄마는 모든 종류의 영사를 다 불러서 설명을 듣고 그 중 F사 영아다중 세트를 샀다고 합니다. 어떤 엄마는 베이비페어 갔다가 샀다고 하고요. 다른 엄마도 이미 구입한 영아다중 활용법 등에 대해 교육받기 위해 영사가 방문하기로 했다고 하네요.

뭐지? 고은양도 사 줘야 하는 건가... 고은맘은 오늘도 팔랑귀를 펄럭입니다..

ps. 다시마 국물을 내서 고구마 미음을 만들어 줬더니 고은양이 ‘어서 빨리 달라’고 입을 벌립니다. 결국 맛이 문제였습니다.

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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