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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미래] 인류와 바이러스 '끝없는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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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7면

세계보건기구(WHO)는 매년 2월이면 '올해 유행할 독감바이러스'의 예측 발표를 앞두고 중국 광둥(廣東)성 일대를 주목한다.

그곳은 이전부터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변종 출현 보고가 잦았던 곳이기 때문이다.최근 전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SARS)의 발원지로 지목되고 있기도 하다.

광둥성 일대는 전세계에서 1백5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1957년 아시아 독감과 68년 홍콩 독감,그리고 97년 조류독감 등의 진원지로 알려져 있다.

광둥성의 환경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보통 사람이나 돼지.조류를 숙주로 삼고 있는데, 광둥성 일대에서는 닭.오리.돼지 등 가축을 집 안에서 사육하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인플루엔자의 숙주들이 한데 모여사는 셈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바이러스가 번식할 곳을 옮겨다니면서 변종을 만들어 인체에 쉽게 침투하는 일이 잦아진다. 그 가운데는 때때로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독성을 띠는 놈도 나온다.

WHO는 이 같은 이유로 88개국 1백10여개 기관에서 넘겨받는 자료 가운데 광둥성의 것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WHO가 세가지 바이러스의 타입을 예측해 인터넷에 발표하면 세계 제약회사들은 세가지 바이러스의 항원을 섞은 백신을 제조해 9월부터 접종에 들어간다.

인체를 숙주로 삼고자 하는 인플루엔자의 '창'을 인간이 백신이라는 '방패'로 막아내는 싸움은 이런 과정을 거친다.

인플루엔자와 같은 바이러스 대 인간의 밀고 밀리는 싸움은 오래된 현재 진행형이다. 인간은 18세기 에드워드 제너에서 비롯된 백신 제조로 대항하고 있고 바이러스는 사스의 경우처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변신해 인간을 괴롭히는 중이다. 치료제가 밝혀진 바이러스의 종류도 극소수다.

바이러스의 존재를 알아낸 것도 먼 과거가 아니다. 1892년 러시아의 이바노프스키가 담배잎에 해를 입히는 모자이크병의 병원체는 세균을 걸러내는 여과기를 통과할 정도로 작은 물체라고 보고함으로써 인간에게 처음 감지됐다.

이후 숙주세포 속에서만 대사와 번식이 가능한 미생물로 밝혀지면서 그 숨은 정체가 한 꺼풀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바이러스가 인류를 괴롭혀온 흔적은 여러 곳에 나타난다. BC 1100년 이집트의 파라오였던 람세스 4세의 미라는 얼굴 부위에 천연두를 앓았던 흉터가 여전한 채 카이로 박물관에 안치돼 있다.

아메리카 대륙 정벌에 한창이던 16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천연두가 남미의 아스테카 문명권을 덮치면서 3백50만명의 원주민이 사망, 스페인군이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제까지 가장 큰 피해로 기록된 바이러스는 1918년 전세계에서 2천여만명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

90년대 들어 당시 사망한 군인의 시체로부터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분리해 분석해 본 결과 인간의 세포에 침투할 때 필요한 헤마글루티닌(HA) 유전자가 그 이전에 발견된 것과 다르다는 사실이 98년 '사이언스'지에 실렸다.

인간을 숙주로 삼는 바이러스의 유전자와 돼지에서만 볼 수 있는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혼합된 새로운 바이러스여서 인간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연세대 의대 이원영 교수는 "숙주가 달라지면 바이러스가 공생의 첫째 단계에서 적응을 다시 시작하는 만큼 많은 피해가 있을 수 있다"며 "시간이 흐르면서 바이러스도 함께 살아가기 위해 독성이 약해지는 쪽으로 변이를 일으킨다"고 설명했다.

숙주가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독성을 유지하다 자취를 감춘 예가 에볼라 바이러스. 99년 아프리카 콩고에서 발병, 순식간에 2백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에볼라 바이러스는 너무 빠른 10일 만에 숙주를 몰살시킨 탓에 자신들 또한 폭넓은 전파에 실패한 채 숨죽여야 했다.

백신을 앞세워 인간이 완승을 거둔 싸움도 있다. 변이를 할 줄 모르는 천연두 바이러스에 대해 전문가들은 고지식하다고 말한다.

감염자의 20%가 목숨을 잃고, 살아남은 사람의 65~80%는 얼굴에 곰보 자국이 선명하게 남을 정도로 위력적인 바이러스였지만 변이를 선택하지 않는 바람에 운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백신의 보급과 함께 위세를 잃기 시작했고,78년 8월 영국 버밍엄의 한 실험실에서 사고로 발병한 두 경우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연세대 성백린(생명공학과) 교수는 "사스처럼 인간이 겪어보지 못한 바이러스의 출현에 당황하는 일이 앞으로 잦아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배경 가운데 하나가 지구온난화에 따른 생태계의 변화다. 99년 미국 뉴욕을 강타한 웨스트나일 바이러스를 분석한 결과 열대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뇌염 바이러스였으나 매개체인 모기가 북상하면서 발병한 경우로 알려졌다.

세계화 진전과 교통수단의 발달로 사람들의 장거리 이동이 쉬워진 것도 바이러스의 빠른 전파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인제대 노현모 인당분자생물학연구소장은 "사람과 바이러스가 공존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여서 바이러스의 완전 퇴치는 불가능하다"며 "수십년에 걸친 연구에도 불구하고 에이즈 바이러스의 백신 개발이 어렵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류와 바이러스의 싸움은 끝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심재우 기자
사진=임현동 기자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리케차=박테리아가 기본적인 대사와 번식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반면 바이러스는 대사활동에 필요한 유전자가 없어 번식을 위해 숙주세포에 침입해야 한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중간 크기인 리케차는 대부분 대사 유전자를 갖고 있지만 DNA 합성 등에 필요한 유전자는 갖고있지 않아 벼룩이나 진드기 등의 숙주세포를 통해서만 번식할 수 있는 중간 단계의 생명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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