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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의 한국인<6>|재미교포 한태경씨,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본지독점연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중공에 머무르는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아무래도 문화혁명과 4인조에 대한 비판의 소리였다.
여행사 안내원은 물론 각급학교 교장·관리등 모든 사람들이 문화혁명때문에 발전이 늦어졌다며 4인조를 공격했다.
안된것은 모두 문화혁명과 4인조의 탓으로 돌렸고 자치주의 한국인들도 마찬가지 얘기였다. 『화국봉이 4인조를 몰아내 자유를 회복했고 세상이 좋아져 미국에서 목사가 오게된것』이라고 내게 인사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문혁이 얼마나 무모했던 것인가를 내게 알려주기위해 그들이 잘 아는 「장철생스토리」나 「적각의생」얘기를 자주 들려줬다.

<웃음거리 적각의생>
장철생은 공장에서 일하며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는데 문화혁명초기에 학교시험답안지를 백지로 내 일약 봉천교육국장에 임명됐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그는 답안지에 답안대신 『나는 답을 못쓰겠다. 지식분자들이 일하지 않고 학교공부만 하는동안 나는 공장에서 나라를 위해 일했다. 나라를 위해 일한 내가 혁명정신이 강한가, 답안을 잘쓰는게 혁명정신인가』고 써냈다.
이에 홍위병들이 장의 정신이 옳다고 들고일어나 교육국장에 임명됐다는 것이다. 장이 그후 일본에 갔을때 일본신문들이 「제로」(공·빵점)선생이 왔다고 소개한 까닭에 중공에서도 한때 「공점영웅」으로 불려졌었다는 것이다.
적각강생이란 「맨발의사」란 뜻으로 읫과대학에서 공부한 의사들을 지식분자라고 숙청하고, 침이나 겨우 놓는 돌팔이 의사들에게 병원을 맡겨 환자를 치료케한데서 나온 말이다.
교통신호얘기도 재미있다.
문화혁명이 한창 고조됐을 때 흥위병들은 지금까지의 교통신호를 뒤바꿔 빨간불이 켜지면 가고 푸른불이 켜지면 서도록 조치했다.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색」에서 왜「정지」해야하는가가 그 이유였다.

<거꾸로된 교통신호>
한동안 교통혼란을 야기한끝에 주은래가 『교통신호는 전세계가 통일해 쓰고있으니 그것은 그냥 두는 게 좋겠다』고해 고쳐졌다고 했다.
요즘 정부는 문혁으로 국민들이 받은 피해를 개별적으로 보상해 주고있으며 생산 노동의욕을 높이기위해 월급외에 초과수당을 지급해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모택동사망후에 서서히 일기시작한 모택동격하운동도 상당히 진전된 것같았다.

<개인숭배 이젠그만>
가정마다 아침 저녁으로 치렀던 「모어녹낭독식」도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고할 정도다.
전에는 아침식사전에 모택동의 사진앞에서 모어녹을 세번씩 들어올리며 만세삼창을 했고 이를 어기면 숙청대상이 됐다고하며 어린이들을 통해 이행여부를 조사했다.
아직도 거리에는 『모택동은 우리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다』는 등의「포스터」가 붙어있으나 모의 영향력은 이제 『서산에 지는 해와 같다』는게 이곳 사람들의 설명이다.
북경시 천안문광장 「민주의 벽」에 나붙은 대자보에도 『1인숭배는 그만둡시다. 당이여, 화주석이여, 우리는 언제까지 굶어야 하고 헐벗어야 하는가』고 써있었다.
중공에 젊은층 인재가 없다는 말이 나오게된 것도 문혁의 죄과라고들 한다.
본격적인 문화혁명기간과 그 전후기간을 합친 10년간 거의 한세대가 학문과 담을 쌓았기 때문에 40세이하의 젊은이들 가운데 실력있는 일꾼이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미국등으로 유학 보내지는 이른바 중공유학생들의 대부분이 40세이상이라고 한다.

<40대들이 도미유학>
문혁동안에는 외국으로부터 송금돼오는 가정은 감시를 받는등 곤란을 당했으나 요즘은 외국친지로부터 돈이 보내지면 오히려 배급표도 더받는등 혜택을 보고있다.
이곳에서는 중공의 석유를 미국이 이제부터 개발 할 것이라든가, 「힐튼·호텔」이 세워될 것이라는등 각종 소문이 나돌고 있다.
외국에서 단체관광객이 밀려들고있으나 받아들일 「호텔」이 없어 애를 먹고 있다고도 했다.
그들은 문화혁명으로 인한 퇴보를 극복하기위해 필요하다면 미국등의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여야한다고 입을 모아 주장한다. 실제로 그러한 노력도 보여지고 있다. 문외한인 내 눈에도 중공의 변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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