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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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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사람은 무엇이나 의심하려고 한다. 특히 말을 의심하려고한다. 시는 여기서 위협을 당한다. 그러나 시는 말을 믿지못하는 사람에게 말을 믿게 하는 비밀을 듣게 한다. 본래 시는 우리에게 노래였었다. 지금도 시와 가를 하나로 보려는 시를 만날 때 이렇다하는 시를 쓴다고 기를 쓰는 시보다 더 강렬하게 삶을 체험하게 된다. 고인이 된 이동 주는 명이 다하면서도 『남도가을』(현대문학) 을 읊었다. 그의 아내는 그 가락을 받아 적었다. 그리고 그 가락은 시가 되었다. 참으로이동주는 시인으로 살다가 시인으로서 숨을 다한 분이었음을 새삼 들이켜 보개 한다. 죽음이 촉박했음에도 그는 다음처럼 읊어주고 갔다. <가이내야 가이내야 엊그제 겨울을 넘진 야들야들 동배추야 술장을 들기에도 숨이 가쁜 가는 목에 힘줄을 주면 자지러진다.> 말을 믿지 않는 시대에, 시는 노래가 아니라고 우겨대는 시대에 그는 끝까지 서정시를 읊어서<시언지>요 <가영언>의 맥을 이어주며 살았다.
그의 서정시가 들려주는 청청한 한을 누가 풍류라고 할 것인가? 그의 시는 삶이 답답할 때<풀한 포기 자생할 수 없는 이 박토에서 천재여 네가 자라기엔 너무 허약하다>그 이 시대의 아픈 곳을 앓으면서「무제」를 읊고 이승과의 인연을 끊었다. 물은 깊을수록 조용하듯이 강우식의『수양버들』(현대문학)이 그렇다. <흥어시>요<관어시>가 어떤 것인가를 『수양버들』 사행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때는 그의 시상이 당돌한 적도 있었다.
이제는 착 가라앉아 볼 것은 다보고 버릴 것은 버리는 상상력의 눈길이 사행시라는 그의 시구조에서 한데를 팔지 않는다. 시는 즐거움에서 슬기로 끝나야한다는 말이 있다. 『수양버들』 은 그 말을 뒤집어서 체험하게 한다. 이 시는 현대시에서 만나기 힘든 .관조의 열락을 체험하게 한다. <풀어줄데>를 잘 풀어주라는 말이 있습니다./수양버들을 보고있으면 그 말이 실감납니다. /저 나무의 흐트러진 초록의 실타래들은/어쩌면 하나도 아니 뭉치고 잘 풀어져 흔들립니까 > 만해가 이 시를 읽는다면 강우식을 시인이라 할 것이고 만났으면 할 것이다. 『수양버들』 은 읽는 자에게 수많은 대화를 하자고 할 것이다. 시표현의 변용이 그 속에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끝항의 물음에 누가 답할 것인가? 저마다의 답을『수양버들』과 나누게 될 것이다. 넉줄의 시가 차분하게 소리하여 엄청난 속정을 헤아리게 한다.
옛부터 우리는 삶이 좋아도 영신을 했고 궂어도 그렇게 했다. 이상국의 『동해별곡』 (심상) 은 맞이굿의 참뜻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다시 만파식적을 불어 준다.
온 나라 부두마다 부왕을 찾아 헤맨다는 처용의 소문이 들릴 때마다/마음이 여린 신의 동해가 울면/크고 작은 식솔들이 죄다 함께 울었습니다. 이렇게 만파식적을 잃어버린 우리가, 그 피리를 찾자고 온 누리의 우려가 울고있는 수라장의 세속을 취타하고 있다. 시상이 장대하니 상상력 역시 상을 잡는데 장엄하다 .시인은 겸허하게 말을 맞이해야 경건한 소리를 들려주게 된다. 이상국은 그러한 비밀을『동해별곡』에서 보여주고 있다.
말이 글이 되어 읽는 이에게 돌려주는 소리는 그 말을 운명적으로 함께 듣는 이에게만 속문을 열어 준다. 신라의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받았던 만파식적을 부왕만을 위해서만 어찌 불었겠는가? 온 누리의 식솔을 위하여 불었듯이 인생에 유욕하니 오늘날에도 동해별곡은 그렇게 피리를 불어준다. 귀가 있는 자는 그 소리를 들을 것이며 정이 있는 자는 시의 소리에서<처용이 새벽 두시 부터울면 신의 동해는 한시부터 우는걸 들었습니다>를 다시 듣게 될것이다.
어찌 처용이 옛날에만 울겠는가? 삶의 병이 있고 고뇌가 어찌 옛날에만 있었겠는가? 지금도 있고 내일도 있을 것이다. 시는 그 점을 진실로 알고 있으니 노래를 불러 미처 모르는 무리를 향해 약수의 소리를 들려주려고 한다.
이상국은『동해별곡』 을 지으면서 그의 상상력이 물리적 심리가 아니라 오히려 주술 생에 따라 시가를 잡아가는 희열을 맛보았을 것이다. 오늘의 독자나 많은 시인들이 이점을 비웃고 있으니 딱한 일이다.
윤재근<문학평론가·한양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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