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즐겨 읽기] 잊혀진 소설가의 이야기 그 속에 스민 나의 과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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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바람의 그림자 1, 2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문학과 지성사, 각 390여 쪽, 각 1만원

누구나 그런 때가 있을 것이다. 방금 뱉은 어리석은 말을 도로 주워담고, 살면서 행한 한심한 행동들을 지워버리고 싶은 때가 있을 것이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는 못했던 말을 하고, 그때 완결시키지 못한 열정을 마무리짓고, 그때 미완으로 남겨둔 창작물을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완성시키고 싶다는 열망을 갖기도 할 것이다. 이 소설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이라는 회한에 사로잡힌 스페인 소설가의 열망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주인공 소년 다니엘은 '잊혀진 책들의 묘지'라 불리는 고서 창고에서 훌리안 카락스라는 소설가가 쓴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을 찾아낸다. 그 책에 매혹당해 단숨에 읽어내린 바로 그날부터 소년은 검은 옷을 입은 사내로부터 추격당하는 위험에 빠진다. 사내는 '바람의 그림자'에 나오는 악마를 닮은 모습이고, 그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 책을 빼앗아 불태워 없애는 것이었다. 소설은 다니엘의 탐험을 통해 카락스라는 인물이 전모를 드러내는 과정과, 다니엘 자신의 성장기적 로맨스가 병치되면서 진행된다.

에밀 아자르의 '모모'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같은 무대를 배경으로,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의 '뒤마 클럽' 같은 사건을 펼쳐나가는 듯한 분위기의 소설이다. 성장기 소년의 눈에 비친 새로운 세상, 풍성하게 등장하는 스페인 문화사, 추리소설적 긴장감, 은근슬쩍 지나가는 유머 등이 버무려져 있어 비슷한 유형의 소설들을 많이 떠오르게 한다.

소설 속 소설가인 훌리안 카락스는 자신의 실패한 삶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싶은 회한 밑에는 그 실패한 것들을 복원하고 싶은 갈망도 있을 것이다. 다니엘이 훌리안을 추적하는 과정은 그의 좌초된 열정을 보살피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시에 소년은 그 불가사의한 인물로부터 생에서 꼭 필요한 용기와 열정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를 터득한다. 이 소설은 궁극적으로 '독서라는 예술' 영역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자 하는 것 같다.

김형경(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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