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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수<문학평론가·외대 교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우리의 삶이 언제나 한편으로 제도화시키려는 노력과 다른 한편으로 그 제도화를 깨뜨리려는 노력의 집합으로 결정된 것이라고 한다면 문학은 다른 분야와의 관련 아래서 볼 경우 후자의 노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은 그러한 제도화가 바로 우리를 억압하는 것임을 인식하고 우리의 사고에 제복을 입히려는 수많은 음모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학은 얼핏보면 집단의 이해 관계에 있어서 부정적인 의미를 띄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삶의 진정한 의미는 제도에 의해서 드러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를 벗어난 어떤 것에 의해 찾아지는 것이며 창조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은 제도화된 모든 것의 모순을 드러내며 끊임없이 문학 자체의 제도화를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이 달의 소설들 가운데서 윤흥길의 『무제』(한국문학)는 바로 제도화되지 않은 두 인물의 창조를 통해 고통의 근원에 관한 깊은 탐구를 보여줌으로써 <소설은 탐구이다>고 하는 명제를 입증하고 있다 조현봉이라고 하는 인쇄소 문선공의 「이미지」와 화자의 고모부의 「이미지」가 교차·대비되고 있는 이 소설은 <끝내 보상받을 수 없는 동경 때문에 일어나는 부정적인 시각 현상을 총칭하는><무제>라는 강한 상징성을 띠고 있다.
한사람은 월남했고 다른 한사람은 자수간첩 출신이라는 점에서 모두 원래의 가족을 이북에 두고 온 이들은 보상받을 수 없는 동경을 갖고있는 비극적인 인물들이지만 제도화된 눈으로 보면 문선을 하면서 어떤 단어를 일괄적으로 <무제>라고 바꾸는 행위나 화자에게 <족하>라는 명목으로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는 행위처럼 희극적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 속에는 갈수록 망각의 심연으로 그 모습을 감추게 되는 것을 붙들기 위한 비극적인 노력이 <배 위에서 보면 마치 육지처럼 보이는 먼바다의 안개>를 통해서 설명을 얻고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라지는 것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비극이 시간과 공간의 간격에 의해 더 심화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문학적 인식이며 동시에 불룩 나온 아랫배에 손을 얹는 아내의 모습을 통해 그 비극이 화자의 세대와 무관하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봉무제>가 학원가의 학생들에게 먹을 것을 사주는 행위는. 일상적인 행위라고 한다면 그가 문선을 맡은 저서의 핵심적인 단어를 <무제>로 바꿔놓는 행위는 문학적 행위가 된다.
김민숙의 『이민선』(문학사상)은 일종의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만다라」라는 가상의 섬나라의 실정이 우화적이며 주인공의 직장생활 자체가 우화적이고 그 탈출의 실패가 소설 서두 부분을 읽을 때 예상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매일 통계 숫자만 다루는 주인공은 처음에는 자신의 정확한 보고서를 <예술품>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신의 기능적 생활에 대해 자신의 기능적 생활에 대해 만족해 하다가 그처럼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에 싫증을 내고 어떤 실수를 계기로 직장을 그만두고 이민을 떠나게 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제도화된 삶을 사는 한 인간이 자신의 그러한 생활에 반기를 들지만 그 때는 이미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없는 사실의 확인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작품이 보다 <살아있는 육신>으로 느껴지기 위해서는 「에피소드」의 평면적인 파악이나 이야기의 도식성을 뛰어넘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이 경계해야하는 것에는 소설 자체의 제도화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신현근의『탈바꿈』(문학사상)은 「서커스」단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우리가 흔히 일어온 소재이면서도 이 작가의 치밀한 묘사가 생존의 비극적인 몸부림이었을 어린 화자의 눈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마지막 부분의 <탈바꿈>을 위한 그 긴 과정이 삶의 현장의 인식에 도움을 줌으로써 마지막 변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의 관점을 빌어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산뜻함이 보다 강렬한 「이미지」를 얻게 될 때 더 많은 기대를 충족시켜 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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