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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잡은 방랑시인… 김삿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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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시와 생애>
그러면서도 김삿갓 시인이 나올 수 있는 배경에 대하여는 잘 인식이 되어있는 것 같지 않다. 즉 그 배경은 바로 우리나라의 과객제도에 있다. 과객은 바로 문사 거지인 것이다. 그들은 양반집 사랑방에 가서 『이리 오너라』 크게 외치고 들어선다. 주인이 없더라도 상관없다. 조금 있으면 간단한 주안상이 나오게 마련이다. 주인이 오면 수 인사를 하고 불꽃튀는 탐색전이 벌어진다.
이 경우 주인이 무릎을 꿇어야 이 문객은 올바른 대접을 받고 며칠 몇 달이라도 그 집에 머무르면서 아이들의 독선생 노릇도 하고 촌궁의 고노들과 수작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조 고사에서부터 풍수·야담·작시·풍월등 문인 취미로부터 장기·바둑등의 장기에 이르기까지 무불통지하여야 제대로 과객의 대우를 받는 것이다. 천민창자들도 시조·판소리등이 능하면 이런 관객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이조시대에 김시습·이사정· 임백호등이 이런 문객의 쟁쟁한 자들이었다.
그의 본명은 김병연. 순조7년(1807) 에 나서 철종14년 (1863)에 돌아갔으며, 그의 출생지는 양주라고도 하고 서울이라고도 하여 분명치 않다. 그는 타가에서 양육되어 과거를 보려고 시장에 나가 시지를 받아보니 홍경래난때 적에 항복한 김익순의 고사었다. 그래서 실컷 욕을 쓰고 돌아왔더니 어머니로부터 바로 할아버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죄인으로 자처하여 상인이 쓰고 다니는 방갓을 쓰고 해를 보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죄인이며 멸극 된 집안이니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단념하여 과객으로 돌아다닌 것이다.
그에게는 많은 시가 있으나 애초부터 엮어진 것이 아니고 과문책 같은데서 뽑은 것이고, 그 나머지는 구전으로 내려온 것을 모은 것이다. 그러니 그의 시는 과거의 모범 답안 같은 것으로 여기저기서 암송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예민한 관찰력과 촌철살인의 풍자와 그러면서 약한 자에 대한 동정어린「유머」의 시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렇게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조선조 말기에 그에 대한 숭앙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이고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많았다는 증거도 될 것이다.
그는 자기를 냉소하여 부부아립등허주
흔들흔들 내 삿갓 빈배와도 같으니
일착평안사십추
한번 쓰고 나선 어느덧 40평생
목수행장수야독
목동의 차림이니 들소를 따르고
어용신세반강구
어용의 신세이니 강구가 벗이로다
한내탈괘춘화수
흥이 일면 이를 들고 완월루에 오르거니
속자의관개허식
속인들의 의관이야 다 허식이련만
만천풍우독무수
만천의 풍우에도 나만은 근심없네….
김동욱 <연세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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