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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미국의 소리」|일구이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73년1월15일 「워싱턴」은 유난히도 춥던 걸로 기억된다. 간밤에 쏟아진 눈으로 거리는 빙판을 이뤄 내 차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굴러갔다. 나는 이날 아침 16번가에 있는 「미국의 소리」방송국 내 사무실에 마지막 출근을 했다.
한국어과의 동료들이자 후배인 김성덕 홍양보 이덕영제씨등 10여명의 직원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모두 실향민들이었다.
고생스럽고 외로운 타향살이에도 지치지 않고 인정을 나눠온 우리들 사이였다. 그들의 이해와 협조가 없었던들 내가 홀가분하게 떠날 수 없었을 게다.
사실 당시 한국말 방송을 하던 우리들에게는 별로 신바람 나는 일이 없었다.
『진실을 보도한다』(To tell the Truth)는 것이 VOA방송의「모토」다. 우리는 이 「모토」에 따라 공산주의 학정의 진상을 보도해 왔고, 북괴의 패망과 조국의 통일을 염원해 왔다.
그러나 72년 7·4 공동성명이 발표된 뒤부터는 사태가 좀 달라졌다. 남북 적십자사 대표들이 서울과 평양을 오간뒤 「미국의 소리」는 한국에서 중계뒤지 않았다.
「미국의 소리」가 방송되는 36개 언어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만이 VOA 한국어 방송을 중계해 왔는데 사정이 바뀌게 됐다.
물론 단파 수신기로 직접 청취가 가능하지만 그런「라디오」를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었다.
우리는 관객없는 무대에 선것처럼 재미없어 했다. 나만해도 통일의「뉴스」를 큰 소리로 전해봤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이 언제쯤일지 내가 그 때까지 살아나 있을지 알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이쯤 해서 물러나서 생을 교회사업에 바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날 내가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들려준 얘기는 24년간의 방송말장이를 통해 절실하게 느껴온 회한같은 것이었다. 『주님을 섬기는 내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해온 것이 부끄럽소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일구이언을 하게되는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흔히 범할수도 있다는 얘기다.
특히 쓰여진 방송 원고를 줄줄 읽어 내려가는 우리같은 「아나운서」는 아까 한 말과 이제한 말이 다를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는 역사의 현장을 쫓아다니는 기자들도 비슷할 게다.
조국이 광복되고 이승만박사가 이끄는 자유한국이 세워졌을 때 우리는 그 얼마나 열광했던가. 나는「마이크」앞에서 그 어른을 민족의 지도자로 추켜세우는데 서슴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우리방송국「텔리타이프」에 들어오는「뉴스」는 그게 아니었다. 나는 3·15 부정선거와 4·19학생 의거를 통해 이박사를 독재자로 몰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놀랄만한 변화였다.
4·19이후 민주당의 장면내각이 들어섰을때 VOA방송은 장총리가 신생공화국의 희망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우리의 예측은 빗나가고 말았다. 5·16새벽에 나는 그가 도망했다는「뉴스」를 전했다.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랄까 나는 이런 따위로 숱한 「두말」을 했던 것이다. 그것이 시대의 흐름에 따른 피할수 없는 현실의 보도였다 할지라도 막상 은퇴키로 작정하고 나니 나는 얼마나 자주 한 입으로 두 말을 했을까 새삼 뉘우쳤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성인군자연해서가 아니다. 약하디 약한 인간으로서 4반세기의 VOA시절을 끝맺음하면서 느낀 솔직한 심정일 뿐이다.
내가 이런 얘기들을 하자 후배들도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이는『그런것이「아나운서」의 비애가 아니겠읍니까』하면서 위로해 주었다.
나는 평생을 말로써 남을 즐겁게 해주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KBS 시절에 신불출이후 만담「프로」를 맡아 전국의 청취자들을 울리고 웃겼다고 믿고 있으며 지금도 닭우는 소리를 나만큼이나 잘 흉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전문적인 연주자라기보다는 우리 선조가 남기신 갖가지 악기를 흉내라도 낼수 있다는것이 내 특기다.
우리 사부자가 톱 연주를 하면 미국사람도 깜짝 놀란다.
말과 소리로써 많은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해복하게 했다면 그보다 다행은 없다. 그러나 은퇴하는 마당에서 느낀 뉘우침은 오래 오래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제 이순을 지나 고희에 든 나는 더 이상 두말을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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