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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 타령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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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가히 그것은 세계기록이 되고도 남는다. 이 세상의 신기록은 무엇이든지 적어 놓은「기네스·북」에도 아직 그런 기록은 없었다.
높이 86cm, 둘레 2백24cm, 무게1백28kg의 호박. 재배자는 농촌진흥청의 연구담당관 배동호 박사.
세계신기록으로는 1970년 영국「코벤트리」의「F·H·스미스」가 세운 무게 92.750kg의 호박. 8년이 지나도록 그 기록은 아직 살아있었다. 그보다 36kg이나 앞선 우리 호박은 필경 오래도록「타이틀」을 방어할 수 있을 것 같다.
재배자는 벌써 5년전에 미국「버몬드」대학의 호박대회에서도「챔피언」을 땄던「호박 박사」. 그때의 기록은 81.3kg이었다고 한다.
호박의 학명은「쿠쿠르비타」(Cucurbita). 「라틴」어의「둥글다」는 단어에서 비롯된 말. 원산지는 열대「아시아」·「아프리카」·미국 등지이며 약20종이 있다. 중국에선 호박을 남과라고 한다. 원산지를 생각한 작명. 우리나라엔 16세기 무렵 중국을 거쳐 전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속담에『호박이 덩굴째 떨어졌다』는 말이 있다.『호박같이 둥근 세상』『호박같이 둥근 사람』… 모두 즐겨 쓰는 일상속어들이다. 원만하며 너그러운 품성이 호박에 비유되는 것은 소박하고 푸석한 그 모양이나 풍미 때문일까.
애호박·늙은호박·단호박·만호박…낮 익은 이름들이다. 호박나물·호박전·호박찌개. 한결같이 구수한 입맛을 돋운다. 애호박은 전으로, 늙은 호박은 국거리로, 그 쓰임새도 다양하다. 늦가을이면 긴 새끼줄에 호박고지를 둥글둥글 엮어놓은 풍경도, 여간 흐뭇하지 않다. 서리맞은 호박일수록 고지를 만들기엔 안성마춤이다.
호박잎 찜도 수수하다. 단호박을 버무린 호박설기는 추수를 끝낸 농가에선 더 없는 별미다. 한겨울 눈이라도 펑펑 쏟아지는 날,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호박설기를 먹는 맛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며 마음마저 푸근해진다.
요즘도 호박은 귀하지 않아 한구석 울타리에도, 뒤뜰에도 심어 가꿀 수 있다. 거름만 잘 주면 절로 자라고 절로 열린다.
하지만 한 그루 장미에는 정성을 쏟을망정 호박을 가꾸는 마음의 여유는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다. 식탁에서 마저 호박은 귀한 손님이 되었다. 호박설기의 맛을 아는 아이들은 글쎄 몇이나 될지….
새삼『호박 같은 세상』도 이젠 옛 말이 되어버린 것 같아 어설픈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호박이 덩굴째 떨어지는 일』에나 눈의 핏발을 세울 줄 알지『호박 같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는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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