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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병원장 시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갖가지 어려움끝에 대학병원 기재와 의사·간호원·의학생등 2백여명은 안전하게 부산에 후송됐다.
그리고 국방부장관과의 약속에 의해 제36육군병원이 창설되었다. 예비역 중령이었던 나는 현역편입과 동시에 병원장에 임명되었다.
1950년12월16일 부산에서였다. 본원은 경남여중·고교에, 분원은 수정국민학교에 두고 밀려드는 전상환자의 진료에 들어갔다.
우선 전상환자 3천4백여명을 인계받았다. 육군본부로부터 차출받은 장교28명과 사병30명만으로 이들을 치료했으니 제때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눈물겨운 장면이었다. 너무나 처절했다. 그리고 충격적이었다.
병원장으로서 첫 회진을 할때다. 마룻바닥에 뒹굴고 있는 전상환자들을 보고 그 처절함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지 않겠는가.
가마니위에 절반이나 찢겨져나간 담요한자락을 덮고 누워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고통과 공포로 일그러진 얼굴들이 마치 구원자가 나타난양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때를 회상하면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북받치는 연민의 정을 억제키어렵다.
당시 나약한 여자의 몸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최보배간호장교가 머리에 떠오른다.
병원의 의사와 간호원및 학생을 교육시켜서 군의관·간호장교·위생병으로 오기까지 만 40일간 최대위는 혼자서 3천4백여명의 환자를 돌보았던 것이다. 나는 최대위처럼 군인정신과 간호정신이 투철한 간호장교를 본일이 없다.
지금도 이따금 그때 이야기를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최여사는 나중에 대령으로 제대, 현재 간호계의 중진으로 활약중이다.
한편 36육군병원 창설과 함께 나로선 참기 어려운 불미스러운 잡음이 생겼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서울대학병원을 군에 팔아 넘긴 장본인이 김동우이다』는 소문이 부산의 대학가 일부에 돌았던 일이다.
내가 대학병원을 군에 팔아넘겼다니. 오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터무니 없는 오해였다. 기가 막혔다. 그것은 차라리 악평이었다. .
애당초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동할 때는 의대나 병원의 전교직원이 한마음 한뜻으로 일시육군병원으로 개편하였다가 훗날 모두 복귀하는 것으로 알았었다.
실제로 당시 신국방부장관과의 약속이 그러했고, 서울대 임시관리책임자 김두혜박사와 백낙준문교부장관도 그런 뜻에서 승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막상 부산에 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탈하는 교직원이 생겼다.
따로 해군이나 공군에 입대하는가 하면 문관으로 배치되기도 했다. 또는 그대로 남아 있다가 후에 보사부 구호병원 요원으로 내려온 대학병원 요원과 합류해서 제주도로 건너가 51년2월20일게 구호병원을 설치했다.
그런 판국에 이상한 소문은 끈질기게 나돌았다.
물론 이같은 소문은 훗날 현미경 3백대를 비롯해서 처음 작성된 「리스트」의 기재전부에다 군에서 얻은 신식 진료기구를 합쳐서 완전 대학병원에 반납하고 학생과 의사 대부분이 함춘원에 복귀함으로써 완전히 사실무근임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1953년5월21일자로 최규남총장으로부터 정중한 문구의 감삿장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감삿장이 오히려 나로서는 서운했다.
감삿장의 내용이 너무나도 정중하고 분에 넘치는 칭찬 일색이었는데 나에겐 격이 맞지 않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대학교수의 자격으로서 비상 전시하에 일시 군복무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감삿장보다는 부하에 대한 공로표창장이 제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감삿장의 내용은 「남의 집 사랍」 대접이었던 것이다.
한편 36육군병원에서 전시하 군에 입대한 의학생들을 내손으로 교육시켜 졸업장을 받게한 일은 군복무시절 가장 기뻤던 일로 꼽을 수 있겠다.
처음 대학병원이 일시 육군병원으로 개편될때 외과대학 4학년생은 육군소위로 임관, 일선에 배치되었고 3학년이하 학생은 위생병이 되었다. 6개월뒤 36육군병원이 서울에 이동한 후 그 학생들의 일부와 다른 욋과대학 4학년 학생들의 일부를 교육시켰는데 이들은 1951년 가을 의무감수료증에 의거, 각각 자기 대학에서 졸업장을 받았다 (다른 일부학생은 대구 제1육군병원과 제5육군병원에서 교육받았음).
이들 학생 군의관이 베푼 사은회 석장에서 나는 감개무량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교수 재직중 가장 기쁜 때가 사은회석장에서 사제지간에 정과정이 통함을 맛보는 때다. 또 책을 팔아서까지 사은회비를 마련했다는 안타까운 실정도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제군에게는 팔책도 없었으리라. 그러니 사양하는것도 참이요, 기쁘게 받아들이는것도 참이다.』 그후 2, 3학년생은 군복을 입은채 각자 대학에서 공부했고 옛과 1, 2학년과 본과 1학년생은 제대하고나서 교육을 받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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