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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김동익>(2311)-<제59화>함춘원시절-??????(22)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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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l930년 봄. 노란 개나리가 활짝 핀 함춘원은 설렘과 흥분과 감격의 물결로 술렁거렸다.
6년전 내가 졸업하던 해 첫 옛과생을 모집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제1회 졸업생 12명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정규외과대학 교육을 마친 것이다.
비록 일제에 의해서 대학교육이 시작되긴 했지만 당시 우리나라 형편으로는 하루빨리 대학교육을 받은 인재가 배출되어야 했다.
따라서 이들 12명에 대한 일반국민의 기대가 컸다. 그들의 포부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12명중 9명이 의학박사학위를 획득했고 대부분이 대학교실에 남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김능기, 김봉응, 김성진, 김룡업, 명주완, 박건원, 박천규, 윤봉헌, 이세규, 이의식, 이정복, 함원영등 12명 가운데 대학에 남아 연구하던 후배는 다음 7명이었다.
김성진(「오가와」외과), 명주완(정신과), 박건원(「오가와」외과), 윤봉헌(안과), 이세규( 「오자와」약리), 이의식(「시노자끼」내과), 이정복(「이또」내과), 함원영(「이와이」내과).
이들 가운데 김성진, 명주완, 이의식은 재학 당시 함춘원의 3걸로 이름을 날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머리가 좋아서 천재라고 다른 학생들의 부러움을 샀다.
아깝게도 이의식 박사는 6·25때 안재홍씨와 함께 납북되고 말았다.
이박사는 원래 뼈대있는 집안의 자제였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임시정부의 첫 의정원장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이동령씨가 바로 그의 아버지다.
노래를 아주 잘 불러 음악회에서 독창까지 했다. 해방 후 정치활동을 하더니 기어이 이북으로 납치되고만 것이다.
지금 미국에서 「엑스·레이」전문의로 활약하는 딸 김정한 박사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는 김성진 박사는 마치 함춘원의 봄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의 화려한 경력과 비슷하게 대학생활 또한 화려했고 인기를 한 몸에 모았다.
「바이얼린」솜씨가 전문가를 뺨치는 수준급이었다. 등산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게다가 필력이 아주 좋아 문학활동도 했다. 그리고 성적도 뛰어났다. 한마디로 팔방미인이었다.
그의 정계생활을 빼놓고는 외국생활에서 개업·대학교수·군대생활·「로터리·클럽」활동에 이르기까지 김박사는 나와 같은 길을 걸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그의 부인 복혜숙 여사는 내 아내 인수와 친교가 있었는데 우리 네 사람이 함께 만주 봉천으로 여행했던 기억이 머리에 떠올라 감회가 새롭다.
1940년께 봉천에서 열린 의학회에 참석하는 길에 김박사와 나는 부부동반해서 여행했었다. 그때 만주에서 이인기씨(현 영남대총장)와 이명구씨(전 의협사무총장)를 만나 암담했던 당시 정세에 대해서 토론했었다.
김박사는 나중에 정치인으로 활약했지만 사실은 유능한 외과의사이자 학자였다.
졸업하자마자 대학병원「오가와」외과에 들어가 연구에 몰두, 박사학위를 얻은 뒤 1935년 외과를 개업했다. 나는 내과를 개업해서 우리는 내·외과의 좋은 「콤비」로 장안에 소문이 자자했었다.
해방 후 김박사는 l년동안 경성대학의학부 외과교수로 후학양성에 열의를 보였는데 6·25때 군에 입대, 36육군병원에서 나와 함께 근무했다.
수복 후 서울의대 학장직을 맡아 어려운 대학살림을 꾸려나가기도 했다.
4·19후 보사부장관으로 발탁되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김박사는 5·16후 공화당과 인연을 맺고 제6대 국회의원, 공화당원내총무, 서울시 당의장, 공화당 중앙상위의장 등 화려한 경력을 과시했다.
의료계에 남긴 김박사의 족적도 뚜렷하다. 결핵협회회장으로서 우리나라에 빈발하는 결핵의 퇴치에 힘을 기울였다.
김박사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유난히 뛰어난 그의 글 솜씨를 부러워한다.
책상머리에 앉아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거침없이 써 내려가는데, 그것이 명문이 된다고 소문이 나있을 정도다. 지금 미국에서 재미한인의사회 고문역할을 하고 있다지만 그의 인품이나 능력으로 보아 국내에서 조금 더 활동해주면 우리 의료계로서도 큰 보탬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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