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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극점비행 경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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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20년대에 들어 북극탐험은 항공기 시대를 맞았다. 누가 먼저 극점상공을 비행하느냐를 두고 각국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가장 강력했던 「라이벌」은 미 해군의 「리처드·버드」중령과 「노르웨이」의 「로알드·아문센」, 「이탈리아」공군의 「움베르토·노빌레」소령 등 3명.

<양극 공중선착 기록 세워>
「버드」는 동료인 「플로이드·베니트」중령과 함께 북극점 비행을 계획, 자동차 재벌인 「포드」가의 후원으로 3발 비행기 1대를 구입했다. 시속 1백92㎞의 2인승 소형기였다. 1926년4월 이들이 발진기지인 「노르웨이」북방 「스피츠베르겐」도로 갔을때 거기엔 이미 「라이벌」「아문센」이 도착, 비행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먼저 발진시동을 건 것은 「버드」. 그는 두번의 실패 끝에 l926년5월9일, 「아문센」보다 이틀 먼저 「스피츠베르겐」을 이륙, 극점을 향해 날았다.
「버드」와 「베니트」가 번갈아 조종하면서 동경11도를 따라 북상, 8시간 후 북위90도인 북극점 상공에 도달했다.
그들은 몇 바퀴 선회비행을 하면서 극점에 성조기를 투하했다. 「스피츠베르겐」에 돌아온 것은 꼭 15시간반 만이었다.
미국은 「피어리」에 이어 이번에는 항공으로 북극점을 정복한 것이다.
그들이 극점 왕복비행에 성공하자 제일 먼저 달려와 축하해준 것은 「아문센」이었다. 「버드」는 그후 남극 상공비행에도 최초로 성공, 「극지 비행의 아버지」가 됐다.
「아문센」이 「스피츠베르겐」에서 극점을 거쳐 「알래스카」에 착륙함으로써 북극해 횡단비행에 성공한 것은 5월14일. 11일 「이탈리아」제 비행선 「노르게」호로 이륙하여 5천4백㎞를 72시간만에 주파했다. 「버드」는 무인지역에 대한 단순한 왕복비행에 불과하지만 「아문센」은 「유럽」과 미국간의 항공로를 처음 뚫었다는 점에서 탐험 이상의 가치가 있다 (오늘날 구주행 KAL기가 「알래스카」와 북극해 상공을 거쳐 「파리」로 가는 항공로는 바로 「아문센」이 개척한 것이다).
최초로 남극점 도달에 성공했고 북극해의 서북항로를 완성한 이 직업탐험가는 누구보다도 먼저 항공탐험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문센」은 남극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북극비행 계획을 세우고 미국에 건너가 전 재산을 들여 대형 단엽기 1대를 샀다. 그러나 「알래스카」에서의 시험비행에서 대파됐다.
다시 비행기 구입자금을 모으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면서 강연을 하고 있을때 탐험을 좋아하는 미국인 부자 「엘즈워드」가 자기를 탐험에 끼어주면 자금을 대겠다고 나섰다.
「아문센」은 「엘즌워드」의 출자와 「노르웨이」정부의 후원으로 3인승 비행정 2대를 구입, 1925년 5월 대원 5명과 함께 「스피츠베르겐」에서 극점으로 날았다. 그러나 약2백㎞를 남겨놓고 「엔진」고장이 일어나 얼음 위에 불시착하고 말았다. 비행정은 육지와 바다에 모두 이착할 수 있도록 돼있었다.
이들은 1대는 버려 두고 1대를 수리, 25일간 얼음 위에 5백m짜리 활주로를 만들어 이륙을 감행했다. 식량이 모자라 「비스킷」3쪽으로 끼니를 때우며 얼음을 깼다고 한다. 그러나 「스피츠베르겐」에 도착하기 직전 비행정은 다시 고장나 불시착, 어선에 간신히 구조됐다.

<얼음 위에 활주로 만들어>
이때 「이탈리아」정부는 비행기를 줄테니 거기에 「이탈리아」국기를 달고 북극탐험을 계속할 것을 제의했다. 「아문센」은 즉각 거부했다.
결국 「이탈리아」에서 비행선 「노르게」호를 싼값에 사고 이 비행선을 설계한 유능한 조종사 「노빌레」 등 「이탈리아」인 6명을 대원으로 끼워주었다. 대원은 미국인 「엘즈워드」를 포함, 모두 17명으로 된 3개국 혼성「팀」이었다. 그러나 대장은 「아문센」자신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뭇솔리니」의 「파시스트」정권이 들어서서 대외적인 국위선양을 위해 급급하고 있을 때였다.
「노르게」호가 극점에 이르자 「아문센」과 「엘즈워드」는 약속대로 손수건 크기의 「노르웨이」국기와 미 국기를 1개씩 투하했다. 그러나 「노빌레」 등 「이탈리아」인들은 대형의 「이탈리아」기를 수십 개씩 마구 투하했다.

<여자만은 정복 못했다>
인품이 점잖은 「아문센」은 남을 헐뜯거나 같은 대원을 비난하는 일이 없었지만 「노빌레」에 대해서만은 수기까지 써가며 호되게 비판하고 있다.
「노빌레」는 그후 단독 북극점 비행을 추진, 1928년5월 「스피츠베르겐」에서 「그린란드」북단을 거쳐 극점상공을 비행한 후 돌아오다 북해에 추락했다.
구조를 호소하는 「노빌레」의 SOS가 전세계에 퍼져 나갔다. 「아문젠」은 「노빌레」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씻고 구조에 나서려 했으나 「이탈리아」정부는 국가체면상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정부의 호의로 「프랑스」공군기를 타고 구조활동을 펴다가 추락, 그가 고향처럼 생각했던 북극해의 얼음 밑에 잠들고 말았다.
당시 56세. 「아문센」은 이때까지 총각이었다. 북극해 횡단비행을 마치고 미국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어느 기자가 『귀하는 남극점과 북극점을 모두 정복했다. 탐험가인 귀하가 앞으로 할 일이 또 남아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때 「아문센」은 『한가지 정복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여자다』라고 대답하여 좌중을 크게 웃겼었다.
한편 「노빌레」는 서구 각국의 구조노력 끝에 「스웨덴」공군기에 의해 구출됐다. 그후 공군소장에까지 진급했으나 잘못된 애국주의와 지나친 이기주의적 행동 때문에 국외추방을 당한 후 행방불명이 되어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조차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구종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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