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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서의 종횡고금 <14> 서양에선 비너스, 동양에선 항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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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춘원(春園) 이광수의 농촌 계몽소설 『흙』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정선은 숭이가 가정교사로 있는 윤참판집 딸이다. 정선은 몸이 가냘프고 살이 투명할 듯이 희고 더구나 손은 쥐면 으스러져 버릴 것 같이 작고 말랑말랑한 여자다. 그는 숙명에서도 첫째 둘째를 다투는 미인이었다. 물론 정선은 숭에게는 달 가운데 사는 항아(姮娥)다.” 이광수는 당시 독자들의 가독성을 염두에 두고 가난뱅이 청년 허숭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미인 정선에 대해 “달 가운데 사는 항아”라는 표현을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독자들은 이 말을 실감나게 받아들일까? 아마 항아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불과 백년 전까지만 해도 이 땅에서는 신화 속의 가장 예쁜 여인을 비너스가 아니라 항아라 생각했다. 즉, 항아는 미인의 대명사였다. 동양의 비너스라 할 항아는 원래 활 잘 쏘는 영웅 예(<7FBF>)의 아내였다. 어느 날 남편 예가 둘이 먹을 불사약을 구해갖고 와 아내 항아에게 맡기고 잠시 외출했을 때 그녀는 욕심이 나 혼자 다 먹어버렸다. 그랬더니 몸이 둥둥 떠올라 하늘로 향해 가다가 달로 숨어버렸다는 것이 그 유명한 ‘항아분월(姮娥奔月)’ 고사다.

 항아가 달에 도착해보니 계수나무 한 그루와 약을 찧고 있는 옥토끼 두 마리밖에 없어 너무 쓸쓸했다. 최고 미인 항아가 달에서 고독하게 지내고 있다는 신화는 문인들의 상상력을 엄청 자극했다. 시인들은 앞을 다투어 항아의 미모를 예찬하거나 그녀에 빗대 고독한 여인의 신세를 노래했다. 예컨대 당나라의 이상은(李商隱)은 여성 수도자의 외로운 심정을 “항아는 응당 불사약 훔친 것을 후회하리, 푸른 바다 푸른 하늘 밤마다 외로워라.(姮娥應悔偸靈藥, 碧海靑天夜夜心)”(‘항아’)라고 읊었다.

소설에서도 항아는 단골로 등장했다. 청나라 이여진(李汝珍)의 『경화연(鏡花緣)』을 보면 항아가 백화선자(百花仙子)를 핍박하여 하계로 떨어뜨리는 것이 소설의 발단이 되고, 김시습의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에서는 항아가 절망에 빠진 고조선의 기씨녀(箕氏女)를 보살펴 준다. 이외에도 고소설이나 판소리 같은 데서 여주인공의 미모를 형용할 때 ‘월궁의 항아’라든가 ‘달나라의 선녀’ 같다는 표현이 수도 없이 나온다.

항아는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선비들의 우상이기도 했다. 선비들은 달 속의 항아가 합격자를 위해 계수나무 가지를 꺾어준다고 상상했는데 이것을 ‘절계(折桂)’라고 했다. 그러나 항아의 신세도 기구했다. 유교 사상이 동양 사회를 지배하게 되면서 사람들(특히 남자들)은 남편을 배신한 항아를 그냥 두지 않았다. 급기야 항아가 벌을 받아 흉물스러운 두꺼비가 되어 달에 살고 있다는 악의적인 버전이 생겼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달 속에 두꺼비가 그려진 것은 이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시대마다 비너스가 다르게 그려진다. 비너스는 각 시대의 여성에 대한 욕망의 총체였다. 항아 역시 단순한 미인이 아니라 이처럼 당대의 욕망을 반영한다. 바야흐로 세상이 바뀌어 항아의 이미지도 변신 중이다. 중국에서는 사라진 여신을 호출해 최근 발사한 달 탐사 우주선을 ‘항아 1·2·3호’로 명명했다. 우리의 상상력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지배를 벗어나 항아가 최고 미인으로 다시 등극할 날은 언제쯤일까.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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