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의 화가 오치균, 공황장애 딛고 세상과 통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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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균은 손으로 물감을 짓이겨 평면 위에 색을 쌓아 질량감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작업실은 의외로 깔끔했다. 군데군데 물감이 튄 흰 벽 뒤로 그의 그림자가 큼직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자고 일어났는데 숨이 가빠오고 무릎 아래 감각이 없었다. 지병인 공황장애 탓이었다. 걸을 수 없어 석 달 가량을 집안에 있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새삼스러웠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신발도, 늘 그 자리에 있던 의자도 달리 보였다. 지난해 여름, 오치균(58)은 걷지 못하는 공포감을 신작 ‘빛’ 시리즈로 이겨냈다. 서울 인사동길 노화랑에서 11∼25일 여는 개인전에서 선보인다. 전시를 앞둔 그를 지난달 29일 강남구 신사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의 그림처럼 울퉁불퉁 표면 질감이 강조된 3층 건물 두 채 사이로 포르셰 카레라가 섰다. 왼쪽 손등에 호랑이 문신을 한 남자가 내렸다. 그는 얼마 전 새로 구입했다는 차,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산꼭대기의 외로운 호랑이” 같이 느껴져 최근에 새겼다는 문신, 그리고 “2007년 그림 팔아서 장만한 두 채의 건물” 자랑을 감추지 않았다. 그림 뒤에 숨어있다 오랜만에 세상에 나온 오치균이다.

오치균의 신작 ‘램프’. [사진 노화랑]

 미술시장이 반짝 호황이던 2007년 이래, 시장은 늘 그를 호명했다. 스스로 ‘욱하는 성격’이라고 말하는 이 다혈질의 화가가 뉴욕에서, 산타페에서, 사북에서 붓 대신 손가락으로 아크릴 물감을 짓이겨 그린 절절한 풍경,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애증을 담은 고향집 감나무 그림 등은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시장에서의 인기는 여전하다. 지난해 말 전두환 일가 추징금 환수를 위한 경매에서 그의 ‘가을 정류장’이 2억2000만원에 팔렸다. 지난해 국내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생존 한국 미술가로는 이우환·김창열·김종학에 이어 네 번째로 작품이 많이 팔린 화가로 꼽혔다(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공황장애를 이유로 세간의 관심을 차단해 온 그는 “술도 커피도 못하고, 사회성도 떨어져 사람들과 만나면 엇박자를 일으킨다. 그저 할 줄 아는 게 그림 그리는 일뿐인데, 사람들이 내 그림을 좋아해 주니 고맙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전두환 일가 추징금 환수 경매에 나왔던 ‘가을정류장’(1999). [사진 K옥션]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오전 대여섯 시면 일어나 씻고 밥 먹고 줄곧 그렸다. 힘든 일 있으면 그림 그리며 삭히고, 너무 좋아도 어깨춤 추며 그렸다. 취미라고는 근력 운동, 왜소한 몸에 콤플렉스가 있다.”

 -‘상업적이다’ ‘욕심 많다’는 오명이 항상 따라다니는데.

 “나만큼 상업적이지 않은 사람도 없다. 나는 내 그림이 아까워서 못 팔겠다. 한 점만 팔라고 작업실 찾아오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 거절한다. 실은 그게 무서워 사람도 못 만난다. 작가가 화랑이나 경매사 등 공식 경로를 거치지 않고 작품을 팔기 시작하면, 시장에서 형성된 그림 가격이 무너진다. 이건 내 그림을 간직하고 있는 분들에게도 도리가 아니다. 내 형제가 열 명인데, 그림 한 점도 안 줬다. 2007년엔 내 그림 한 점이면 시골집 한 채 살 정도였다.”

 -활황 때에 비해 작품 값이 뚝 떨어졌다.

 “나는 30년을 버텨왔고 30년을 기다려왔다. 앞으로 30년도 자신 있다. 그릴 때는 ‘포기해’ ‘시간낭비지’ 하며 수십 번은 갈등 하지만, 그려놓고 보면 흡족하다. 이렇게 말하면 욕 먹겠지만, 요새는 그리는 족족 마스터피스(걸작) 같다. 이제 예순이 다 되어 그저 내 귀가 순해져(耳順) 그러는 건지, 정말 좋아진 건지는 전시장 와서 판단하시라.”

 -‘잘 팔리는 작가’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나.

 “아니다. 내 그림 계속 잘 팔렸으면 좋겠다. 잘 팔리는데 내가 안 파는 거라면 좋겠다. 그렇지만 나도 화랑이 아니라 미술관에서도 전시하고 싶고, 해외 나가서 인정받고 싶다. 나도 (인기 시리즈인) 감만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글=권근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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