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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튤립의 나라에 살아 있는 우국의 넋|헤이그 이준 열사 묘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네덜란드」는 「튤립」의 나라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튤립」꽃이 널따란 들판 가득히 피어 있다.

<국토 25%가 바다 밑>
「튤립」 광란이 「유럽」을 휩쓴 17세기이래 「튤립」 재배는 이 나라의 주요 산업이 되었다.
울창한 숲과 고색 창연한 고 건물들, 그리고 경사 심한 「피라미드」형 지붕을 가진 농가도 인상적이지만 풍차와 「튤립」은 이 나라 특유의 경관을 이룬다.
잘 다듬어진 도시나 농촌 길을 자전거로 달리는 「네덜란드」인들의 모습은 여유와 검약을 함께 느끼게 하는 풍경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국토의 25%가 바다보다 낮은 땅이고 나머지 45%가 모래 언덕과 늪지였던 이 나라를 이토록 가꾸고 다듬은 「네덜란드」인의 노력을 잠시라도 잊을 수 없다.

<「더치·페이」의 정신>
5만의 인명을 앗겼던 1287년의 대홍수와 같은 수십 차례의 홍수 때 겪어야했던 시련도 알찬 밑거름이다.
「네덜란드」는 기나긴 역사가 간척 사로 점철되어 있다.
오늘날 거미줄처럼 이어진 운하 사이로 선유를 즐기고 널찍한 「튤립」 꽃길을 만유할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용감한 민족 기질 탓이다. 용자이기에 간척에 나설 수 있고 간척하는 민족이기에 일찌기 「아시아」의 대국인 「인도네시아」를 3백여년 간이나 통치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네덜란드」 사람들이 용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인 뺨치는 상술이 있고, 「페르샤」인을 능가하는 손재주가 있다. 그들의 상술은 17세기께부터 대서양과 인도양에서 진가를 발휘, 엄청난 재화를 긁어모은 끝에 드디어는 「더치」 (화란의)라는 형용사를 만들고야 말았다.
여기에 이들의 손재주는 웅대하고도 섬세하다. 총 연장 2천4백여km의 제방과 끝없는 운하를 만든 억센 손길이 있는가하면 「고호」「렘브란트」 등 절필의 화객이 있다.

<부와 문화 함께 이룩>
한국과는 이미 「하멜」이 와서 진귀한 서양의 문물을 소개했던 조선 중기로부터 관계가 틔었지만 망국의 한을 품고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이준 열사로 해서 더욱 잊을 수 없는 나라다.
「헤이그」 교회 「니에·아이큰다인」 공동 묘지 안에 있는 이준 열사의 묘지는 지난해 흉상과 묘비가 제막되어 한결 정화돼 있다.
외무부의 「이 열사 묘적 정화 사업」은 3천5백만원을 들여 이루어졌다. 조각가 백문기씨(전 이대 교수)가 높이 90㎝·어깨 폭 72㎝·가슴 두께 40㎝의 청동 흉상과 높이 2·3m의 조석 묘비, 그리고 애석으로 만든 상석과 화강암 석병풍, 대리석 화병·향로들을 모두 서울에서 제작, 옮겨왔다.
묘역 바닥과 울타리에 쓴 화강암은 거울같이 비치도록 7천번의 물 갈기로 곱게 갈았다. 습도가 유달리 높은 「네덜란드」 지역에서 돌의 산화를 막고 이끼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이 열사의 흉상은 분사 며칠 전 「헤이그」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에 따라 수염이 있는 기품 있는 모습이다.

<묘비 등 서울서 제작>
열사의 묘지를 찾는 한국인의 발걸음은 그침이 없고 싱싱한 꽃다발도 끊이지 않고 놓인다.
「파리」의 유학생이건, 서독에서 일하는 광부들이건 한국인들은 이역의 외로움과 고달픔을 달래고 뜨거운 동족애를 확인하려는 듯이 열사의 묘지를 찾는다.
기자가 이 열사의 묘역을 찾아들었을 때에도 두 어린이를 이끈 한 한국인 주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72년엔 저녁 늦게 닫혀버린 공동 묘지의 담을 넘어 들어간 한국인 청년들이 출동한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단지 애국 열사의 묘역에 참배하려는 순수한 뜻」이 판명되어 석방, 화제가 된 일까지 있었다.
묘역은 원래 가로 3·6m, 세로 2m가 못돼 몹시 협소했고 묘비의 국명조차 잘못 표기돼 있었다. 화장은 「네덜란드」 정부와 공동 묘지 측의 협조로 이루어졌다.
인접 묘지의 연고자들을 설득, 이들의 묘지를 옮기고 8필지의 공간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6·25로 한국과 혈맹>
또 묘역에 이르는 길도 「블록」 포장해주었다. 묘지 앞에서 38년간 꽃가게를 했다는 「바커」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이 열사의 묘소에 들러 꽃이 시들지 않았는가를 확인하고 가게문을 여는 열렬한 한국「팬」이다.
5, 6년 전 이곳을 찾은 한 한국인 여행자가 꽃값 3백「달러」를 맡기고 갔기 때문에 꽃이 없는 날마다 2, 3「달러」어치의 꽃을 가져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 나라는 6·25때 3천9백72명을 파병, 1백20명의 전사자와 6백45명의 부상자를 낸 혈맹이기도 하다.
용맹스런 「바다비」족의 후손으로 그들 선조들이 단순히 자유를 위해 싸웠듯이 20세기의 「자유」를 위한 싸움터를 찾아 먼 동방에까지 말려왔던 것이다.
지금도 이들의 뜻을 기념해서 매년 10월30일, 강원도 횡성군과 「아우트하스텔」시는 자매 결연에 따른 행사를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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