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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회전 신호 지키면 바보 되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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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재숙
정재숙 기자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정재숙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기자

아랍 출신의 한 테러리스트는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고의로 행인을 치고 차에서 내려 칼로 도륙했다. 그러곤 주위 사람들에게 외쳤다. “끔찍한가? 내가 사는 곳에서는 이런 일이 매일같이 일어난다.” 이라크에서는 한 번에 수십 명씩 숨지는 폭탄 테러가 일상이 되었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게 외쳐야 할지 모른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는 이런 일이 매일같이 일어난다.”

 며칠 전 대낮에 일상 공간에서 화마의 습격을 받아 숨진 고양터미널의 희생자들 역시 아마 한 달 넘게 세월호의 아이들을 떠올리며 눈물짓곤 했을 것이다. 바로 그 슬프고 황망한 죽음의 악마가 순식간에 내 앞에 나타나 흉측한 혀를 날름거릴 거라고 꿈엔들 짐작이나 했을까. 그러고도 이틀 지나 다시 또 전남 장성의 요양병원이 불탔다.

 이젠 새삼스러울 일도 없다. 백화점이 통째로 무너지고 공중 도로가 떨어져 나가는 등으로 숱한 목숨들이 스러져 간 이후 20년 만에, 과연 한국사회는 확실한 ‘위험사회’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이제 죽고 사는 것은 거의 확률 게임이 되었다. 동아시아 끝 한반도에 깃들여 사는 악마는 우리의 귓전에 이렇게 속삭인다. “너와 네 가족만 안전하면 되는 거야.” 하지만 이 지독한 러시안룰렛 게임에 무슨 안전판이 있을까.

 원시인들은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존재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원시인이었을까. 명예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희생의 문화가 어차피 우리와 인연이 깊지 않다 하더라도, 살신성인은커녕 최소한 더불어 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데에는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아이들의 죽음은 생중계되었다. 부모들은 그 마지막 얼굴과 마지막 목소리를 끊임없이 꺼내보고 되풀이해 들을 것이다. 그 켜켜이 쌓인 한을 어찌할 것인가. 몇 년 전, 죽은 아빠 곁에 며칠 동안 홀로 남겨졌던 유아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어느 시인은 만 하루를 울었다고 했다. 이 두려운 인간 재앙 속에서 인성교육 운운하는 언 발에 오줌 누기보다는 차라리 한 편의 시라도 진지하게 읽히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다. 시인들은 곧 언어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법과 규범과 도덕과 약속은 언어로 되어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침몰하고 소진되는 이 시대에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언어의 가치였음을 기억할 일이다. 무엇보다도 정치적 언어야말로 실체와 유리된 허깨비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운전을 하는 가까운 지인의 하소연은 꽤 걸쭉했다. 길을 가다 큰길 어귀에서 ‘우회전 신호 준수’ 표지판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하라는 대로 멈춰 있다 보니 그 길에서 거의 공적 1호가 됐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무시하고 경멸하듯 옆 차로로 쌩쌩 우회전해 가는 것을 보노라면 혼자 바보 된 느낌에 눈물까지 핑 돈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 후 언젠가 그 표지판은 ‘적신호 시 우회전 금지’로 좀 더 강력하게 바뀌었다고 한다. 이제 그 길 위에서 운전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역시 규칙은 지켜야 하는 거라고? 또는 시키는 대로 해본들 안 죽으면 다행이라고?

 언어가 타락할 때 사회적 규약은 사기 또는 협박과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우회전 신호를 곧이곧대로 준수하는 운전자는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이기적으로 행동하면서 나는 바보가 아니라고, 또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외칠 것이다. 세월호의 선원이 바로 그랬다.

 그럴수록 죽은 아이들은 더욱 불쌍하다.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말끔하게 솟아올라 끊임없이 전화질만 해대던 1등 항해사와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듯 젖은 돈을 말리던 선장. 이들의 ‘인성’ 파탄은 준법정신에서 인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이 공동체의 와해를 상징한다. 모멸당한 언어의 보복이 이토록 크다.

 소설가 김애란은 익사할 뻔한 위험에서 자신을 구해준 여덟 살 소년의 추억을 그린 소설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서 자각한다.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누군가가 나 때문에 많이 아팠을” 거라고. 우리의 봄과, 그리고 여름은 어떤가.

정재숙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