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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규 KAL 기장의 9일간 소련 체류담|조사는 진중하고 대접은 친절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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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코펜하겐=장두성·주섭일·조남조 특파원】우리는 1917년10월 「러시아」 혁명 후 「갈렐리아」 공화국의 「켐」시를 방문한 최초의 외국인이었다. 물론 불행한 사건으로 인한, 정상적인 방문은 아니었지만 「켐」시 3천여 시민으로부터 조용하고도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뜻밖에 나타난 우리들에게 소련말로 인사를 보내고 말을 걸어오기도 했으나 언어 불통으로 서로 의사는 통할 수 없었지만 이들의 맑은 미소, 얼굴표정에서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과 따뜻한 인정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시민들 중에는 우리 소식을 듣고 숙소에까지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 중에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호의를 보이기도 했다.

<숙소 찾아 온 소시민>
우리들은 다른 승객들이 석방된다는 말에 무엇보다도 반가웠고 우리도 함께 떠날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으로 한동안 멍해 있었다 .괴롭고 불안한 하루 하루였으나 우리의 승객들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한 가닥 위안을 받았다.
승객들이 석방된 후 우리는 군 휴양소에서 일반 여행자들이 묵는 여행자숙소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우리는 계속 조사를 받았다. 질문은 주로 기술적인 문제에 집중되었다.
그들은 『왜 항로를 벗어났는가』 『소련 영공을 침범한 사실을 아는가』고 물었고 『우리 전투기의 유도 신호를 보았는가』고 되풀이해서 물었다.
질문 공세 때문에 이근식 항법사가 진땀을 뺐다.
이 항법사에게는 더듬거리지만 그럭저럭 의사 소통은 되는 소련 사람 통역이 붙었다.
나에게는 유창한 영어를 할 줄 아는 심문관이 질문을 했는데 또 영어 통역관이 따로 배석했다.
이 항법사는 기술적인 용어를 동원한 까다로운 항법상의 질문을 받았다. 심문관들은 항법문제를 되풀이해서 따졌다.

<여행자와 식사도>
이 때문에 이 항법사는 한번 진술한 대답을 되풀이해야만 했으며 기억을 더듬느라 퍽 고생하는 표정이었다.
소련 조사관들 중에는 민간복 차림과 대령 계급장을 단 군인도 있었다. 일반 여행자 숙소에 옮겨진 때부터 우리는 한방을 같이 쓸 수 있어서 고독과 불안을 다소나마 씻을 수 있었다. 우리는 옛 추억을 되살리면서 북극 「툰드라」의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둘이 한방을 쓰니까 우리는 서로 의지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날씨는 맑은 날이 계속됐으나 낮 시간은 잠깐뿐이고 밤이 길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방안에서 보낸 우리들에게는 백야만이 계속되는 느낌이었다.「켐」시는 인구 3천명이 될까말까한 작은 시골 도시로서 외국 관광객을 위한 「호텔」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숙소 2층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소련인 여행자들과 이 마을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들은 이들 속에 섞여 식사를 했다. 식사는 주로 「햄버거」나 「비프스테이크」 비슷한 고기류였다.
우리들에게 l명의 소련인 안내원이 따라다니면서 돌보아 주었다 우리의 생활에 무슨 불편한 것이 없느냐고 물으면서 진심으로 도와주려 했다 심지어는 식성이나 기호 등을 물어 우리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구해주려고 했다 .한번은 우리가 국수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여기저기 수소문해가면서 구해오기도 했다.

<켐 시내 드라이브>
식사 후 식곤증이 자주 생겨 우리는 안내인에게 한가지 요청을 했다.
『식곤증이 심하니 운동을 하게 해달라.』 그는 즉시 소련제 자동차를 끌고 와서 우리를 태우고 「켐」 시내를 「드라이브」하면서 이곳저곳 구경시켜 주었다. 마을은 조용하기만 할 뿐 인상 깊게 돌아 볼 만한 것은 없었다.
지난달 28일 낮 안내인은 갑자기 영어로 『You will meet a foreign diplo-mat (당신은 외국 외교관을 만나게 될 것이요)』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돌아갈 수 있겠구나 고 생각했다. 만나게 된다는 외교관이 단순히 우리를 면회만을 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9일 아침 우리는 식사를 마친 후 숙소에서 좀 떨어진 비행장에 가서 쌍발 군용기를 탔다.
이 군용기가 우리를 「레닌그라드」로 실어다 주었다. 군용기의 기장과 항법사는 소련 공군대령이었으며 부조종사는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쌍발 군용기는 귀빈용 특별 비행기 같았으며 승무원들은 우리에게 무척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군용기의 기내 의자는 KAL기의 1등석을 방불케 할 정도로 푹신푹신했다. 「레닌그라드」 는 눈이 번쩍 뜨일만한 대도시였다. 「파리」와 비슷한 고색 창연한 건물들이 많았으며 거리는 소련제 자동차가 많이 보였다. 우리는 「레닌그라드」에서 그곳 TV 기자들과 회견했다.


이 기자들 역시 항로 이탈 이유 등을 주로 질문했다. 마지막에 어떤 기자가 『당신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성명을 들었는가』고 물었다. 우리가 어리둥절하는 순간 이 소련 기자는 가장 감동적인 한마디를 덧붙었다.
『소련 국민은 모두가 성명을 환영하고 있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핑 눈물이 돌았다.
회견이 끝난 후 우리는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레닌그라드」 주재 미국 총영사관으로 갔다.
78년4월29일 정오, 우리는 소련 측으로부터 미국 측에 인계되었다
미국 부영사 「오스카·클라이어트」씨가 인사를 하면서 「코펜하겐」까지 동행한다고 말했다. 이날 하오 6시40분 우리는 부영사와 함께 「레닌그라드」 공항에서 「스칸디나비아」항공의 SAS 733편에 올라탔다.
몇몇 승객들이 우리가 누구라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1시간쯤 지나 하오 7시10분 드디어 여객기는 소련 땅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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