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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기 사건…앞으로 남은 문제|기장·항법사·기체는 어떻게 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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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승객과 승무원이 돌아옴으로써 KAL기 소령강제 착륙은 억류중인 KAL기의 기장·항법사 및 기체 송환만이 교섭대상으로 남게 됐다.
한·소 양국이 소령공 침해에 대한 원인행위를 어떻게 규명하느냐는 문제는 서로 견해를 달리할 소지가 없지 않으나 아직은 장기실형선고 등 최악의 사태로 발전할 것 같지 않은 것으로 관계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그것은 ▲소련정부가 관례를 벗어나 석방 승무원 중에 부기장을 포함시킨 것은 호의적인 「제스처」로 볼 수 있으며 ▲미국과 일본이 소련전투기의 민간항공기에 대한 발포사실을 문제삼으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고 ▲소련이 굳이 세계여론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승무원을 장기 억류할 것 같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원 석방이라는 「코시긴」수상의 구두 언약이 있었음에도 소련당국이 기장과 항법사를 계속 억류한 것은 국제적인 이목을 의식, 인도적인 제반 조치는 취하되 일단 KAL기가 자국 영공을 침범했다는 사실을 대외에 분명히 알리고 기체에 총격을 가한 그들의 행위가 점당했다는것을 입증하기 위한 결정으로 풀이된다.
이에 반해 한국측은 KAL기가 북극상공을 정기운항하는 민간항공기인데다 사고의 원인이 계기고장에 의한 불가항력적인 것이어서 이런 경우 국제관습법에 의거, 기장 등은 형사처벌에서 면제돼야 하며 기체도 반환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상이한 주장은 사고원인에 대한 객관적인 조사결과가 나오고 정상적인 「채널」이 열려 있어야 판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고 조사권과 억류 승무원의 신병을 소련측이 쥐고 있어 정부가 현단계에서 외교적인 분쟁해결 방법을 통원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제3국을 통한 사무적인 차원에서 송환교섭을 벌이되 외교적인 「센스」를 가미한다는 것이 교섭의 「상한선」이 될 수밖에 없다.
구체적인 조치로 정부는 『외교관영사업무에 관한 「빈」국제 협약』에 의거, 미국정부에 KAL 억류자에 대한 영사보호를 정식 위임, 의뢰했다.
동협약 46조에 의하면 정부는 소련이 동의한다면 주소미국 대사에게 우리 국민의 보호권을 의뢰할수 있으며, 미국공관의 영사관헌은 한국정부의 위임을 받아 구금된 우리 국민을 방문, 면담하고 교신할수 있고 나아가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법적 대리인을 주선할 권리를 가진다(동36조).
소련정부가 미국의 위임권에 동의할지 여부가 아직 미정이지만 고의나 적대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면, 국교가 없는 국가간에 제3국을 통하는 영사보호 의뢰는 수락하는 것이 상례이며 이를 소련이 거부할 경우 국제적 비난의 우려가 있다. 여기에 위임권을 받은 미국의 체면을 봐서도 받아들일 것으로 정부관계자들은 내다보고 있다.
월남 패망 후 우리 정부가 「프랑스」에 영사보호를 의뢰해 잔류교포의 보호와 송환을 교섭한 것이나 일본을 통해 소련정부와 「사할린」 교포송환 교섭을 벌인 것은 좋은 예다.
최근 태국정부의 중재로 KAL의 「사이공」 영공통과권을 공산월맹과 교섭한 것도 비슷한 범주에 속한다.
과거 선례로 봐 소련은 억류 승무원을 재판에 회부할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작년에 「캄차카」 연안에서 조업 중 영해침범혐의로 나포된 한국어선에 대해서도 소련은 어부들은 조기 석방했으나 선장은 재판에 회부, 징역 2년을 선고해 복역케 했다(감형돼 6개월만에 특사).
KAL기의 경우 영공침범이 불가항력적인 것이냐에 대한 명확한 판정, 미일 양국의 대소교섭력 등이 승무원·기체송환과 함수관계를 이룬다고 보겠으나 소련형법에 의한 처벌기준(훈방·벌금형·징역 10년 이하)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외무부는 기체반환과 관련,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도 협조를 요청해 놓고 있다. 이 기구 협약은 회원국의 항공기가 조난 당했을 때 구호조치는 물론 그 항공기의 등록국(KAL기의 경우 한국)이 사고 조사에 입회인을 파견할 길을 터놓고 있다.
그러나 우리와 국교가 없는터에 총격을 가한 소련이 한국 입회인이나 ICAO조사단의 입국을 허용할지는 의문이다.
또 KAL측은 불가피하게 소영공을 침범했는데 소련이 총격을 가해 사상자를 내고 기체를 파손했으니 손해를 배상하라고 요구할 법도 하지만 이때 원인입증 책임이 한국측에 있어 실현 불가능하다.
이보다는 북괴를 의식해야할 소련이 승객이나마 이처럼 빨리 성의 있게 보내준 것을 정확히 평가해 우리의 외교 실력화하는 작업이 더 중요할 것 같다.
이번 사건에서 주목할 것은 이제 적어도 소련이 국제적인 일반원칙을 무시하면서 한국을 차별 대우하지는 않고 있다는 점이며 아직도 미국과 일본은 우리 외교에서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년에 들어 우리와 소련과의 비정치적 교류는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소련영공 통과권 교섭이나 직항노선 개설, 「시베리아」산 원목의 정책 수입등은 아직 시기상조라 하더라도 소련군함의 대한해협통과권 문제등은 당장 양국이 관심을 가질수 있는 현안이며 재외공관에서 양국외교관의 접촉도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그러나 KAL기 사건이 대소관계 개선의 계기가 되기는 어렵다. 다만 대소 접촉을 우호적인 쪽으로 유도할 수도 있을 것으로 외교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KAL기 송환 결정이 있은 후 외무부가 장관명의로 『전공관은 정부의 송환 노력에 나쁜 영향을 미칠 언동은 삼가고 대소 접촉에 힘쓰라』고 훈령한 것은 북괴의 대미 「핑퐁」외교에 대항하는 우리의 「대소불시착외교」의 활성화를 시사한 것이기도 하다. 【전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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