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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송·혁명가요 묘한 동거 … '북한 크레용팝' 모란봉악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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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평양에선 요즘 모란봉악단이 제일 잘나갑니다. 가창력에 미모까지 갖춘 스타급 가수 공연이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죠. 대형스크린에 레이저 조명까지 쏘아대는 화려한 무대는 이전엔 평양에서 접하기 힘든 장면이었습니다. ‘평양판 걸그룹’으로 불리는 이들은 무대를 내려와 주민들에게 악수를 청하고 사진을 찍는 모습도 드러냅니다. ‘도도한’ 소녀시대와 달리 친숙하게 어울리는 크레용팝에 가깝다고 할까요.

 어제 아침 노동신문이 모란봉악단을 “보고 또 보고 싶은 매력적인 공연… 자기의 뚜렷한 얼굴을 가진 멋쟁이 악단”으로 극찬했더군요. 이젠 김정일 시기 전성기를 누린 은하수관현악단을 눌러버린 듯합니다. 창단 2년 만의 급부상은 2012년 7월 창단공연 때 이미 예고됐습니다. 이설주가 북한 퍼스트레이디로 데뷔를 할 때 모란봉악단도 선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중앙TV가 방영한 모란봉악단의 공연영상을 꼼꼼히 들여다봤습니다. 특이한 레퍼토리가 눈길을 끕니다. 혁명가요로 구성되던 공연은 중·후반부 ‘세계명곡 묶음’이란 대목부터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모차르트교항곡 모음을 시작으로 ‘가극 극장의 유령’이란 북한식 제목을 단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 주제곡 선율이 울려퍼지더니 ‘오솔레미오’, ‘백조의 호수’, 팝음악이 이어집니다.

 악기도 남다릅니다. 일본 브랜드인 롤랜드(Roland)의 디지털피아노와 드럼, 코르그(KORG)의 신시사이저, 야마하(YAMAHA)의 피아노 등이 어우러집니다. ‘항일정신’이 정권 토대인 북한에 웬 일제 브랜드냐고요? 평양음대 출신인 탈북 천재 피아니스트 김철웅씨에게 물어봤습니다. “김정일 때부터 최고지도자가 직접 챙기는 악단에는 일본산 등 세계 수준의 악기가 지급됐다”는 답입니다. 해당 악단원들에게는 ‘금기(禁忌)시되는 일본 브랜드도 마음껏 연주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이 악기들이 낡으면 청년예술단 등 일반 악단에 돌아가는데, 북한에선 이마저도 감지덕지라고 하는군요.

 모란봉악단 사람 가운데는 현송월 단장이 우선 눈에 띕니다. 은하수관현악단 가수 시절 ‘준마처녀’란 노래로 유명한 그녀는 한때 김정은의 연인이란 설이 나돌았죠. 지난해 가을 악단과 관련한 추문설에 숙청됐다는 일부 언론 보도가 나왔지만, 이달 중순 평양에서 열린 ‘예술인대회’에 단장 자격으로 연설하며 오보로 판명났습니다. 정보 당국자는 “은하수관현악단 단원들이 지난해 7월 이후 단원 간 성추문 문제로 처형된 건 사실이지만, 모란봉악단이나 단장 현송월까지 번진 건 아닌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습니다. 은하수악단은 사실상 해체 상태라고 합니다.

 단원 중에는 라유미와 류진아가 쌍벽을 이룹니다. 서구형의 얼굴에 맑은 음색을 가진 라유미는 지난 17일 ‘공훈배우’ 칭호까지 받았죠. 같은 공훈배우인 류진아는 표정연기가 압권입니다. 바이올린에 능숙한 선우향희는 연주가인데도 동양적 외모로 인기가 높습니다. 이들은 유행을 선도합니다. 세련된 단발 헤어스타일은 젊은 여성층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는군요. 라유미와 이명희·박미경 등이 차고 나온 팔찌형 장신구도 대유행입니다. 반짝이는 에나멜톤 하이힐과 짧은 치마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란봉이 걸치면 다 패션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합니다.

 모란봉악단 가수의 대부분은 평양 금성학원 출신이라고 합니다. 일찍 북한식 창법을 배우고, 무대에도 데뷔했습니다. 이설주도 금성학원을 나와 중국에 유학(성학 전공)했습니다. 연주자는 대부분 평양음대 출신이 장악하고 있다고 합니다. 클래식 불모지 북한이지만 특권층 자녀나 영재 대상 교육으로 명맥을 잇는다고 합니다.

 모란봉악단 공연에는 ‘음악정치’로 불리는 김정은의 통치코드가 반영돼 있습니다. “원수님(김정은을 지칭)의 음악정치를 앞장서 받들어 나가는 제일 근위병”(노동신문 26일자)이란 표현에도 담겨 있죠. ‘노래폭탄’이란 표현도 등장합니다. 공연을 끝낸 단원들이 무대 아래 김정은에게 달려가 환호하는 장면을 연출해 ‘은정과 배려’를 부각시킵니다. 이른바 ‘친솔(親率·김정은이 직접 챙긴다는 의미) 악단’을 통한 선전선동술입니다.

 북한 예술악단의 흥망사를 짚어보면 결국 그들은 체제 결속과 선전·선동을 위한 종속물이란 생각이 듭니다. 악단의 유효기간은 최고지도자의 애정이 식을 때까지이기 때문입니다. 김정은도 아버지가 물려준 은하수관현악단을 버리고 자기 취향대로 모란봉악단을 새로 띄웠습니다. 오는 9월 인천 아시안게임엔 북한 선수단과 함께 응원단이 올 것으로 보입니다. 9년 전 인천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는 당시 학생이던 이설주가 응원단으로 왔습니다. 이번엔 또 어떤 미래의 악단스타가 숨어있을지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이영종 외교안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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