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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자 체불기『어느 정치적 살인자』 요지(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홍종우의 정신속에는「독립」이란 것과 천진난만한「굴종」이 이상하게도 혼합되어있었다』고「레가메」는 설명했다. 이것은 그후 홍의 김옥균 암살행위를 설명하는 한 단서가 됨직도하다. 다음은「레가메」의 『홍종우 체불기』요지.
「프랑스」외무성으로 「코고르동」씨를 만나기 위해 갔을 때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다. 홍종우는 외무성 건물에 도착하자 한-불수교 조약에 처음으로 서명하기 위해 서울에와 고종황제의 궁전에서 만난적이 있는 한사람이 그의 앞으로 걸어나오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 조약 서명식에 홍은 비서관 자격으로 배석했던 것이다.
내가 보고있는 앞에서 홍은 감동에 못 이겨「코고르동」씨의 발 앞에 엎드려 그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일순간 홍은 구제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얼마 후 외상이 된「코고르동」씨가 고도의 정치적 이유 때문에「프랑스」는 조선 및 조선인에 관한 모든 사항을 모르는 체 넘겨버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듣게되었다. 이이상 더「코고르동」외상을 귀찮게 할 필요가 없었다.
홍종우는 왜 「프랑스」 외상이 그와의 면담을 허용하지 않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프랑스」관광협회는 아주 각계의 직위가 높은 사람들로 구성되어있으며 때때로 이들과 관계있는 일들을 논의하기 위해 저녁만찬을 갖기도 한다. 또한 프랑스」를 영광되게 한 업적이나 지구상의 새로운 발견을 한 탐험가들의 이야기들도 듣는모임이다. 홍종우도 이들에게 소개되었다.
홍종우의 정신 속에는 독립-그의 말대로-이란 것과 천진난만한 굴종이 이상하게도 혼합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굉장한 조심을 하면서 나에게 사진 2장을 주었는데 한장은 군주인 왕의 사진(고종)이고 다른 한장은 왕의 할아버지 사진이었다.
그는 범법을 하지않으려는 이유 때문인지 이 사진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림밑에 주인공의 이름을 쓸수가 없다. 나는 사진을 그에게 돌려주기 전에 비교적 정확하게「스케치」했다. 여기 실은 필화가 바로 그것들이다. 홍종우는 내가 이사진들을 발포함으로써 범하는 신중하지 못한 행동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것이다.
그후 홍종우는「귀메」박물관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박물관은 조선·중국·일본어를 번역하도록 하기위해 그를 고용했었다. 그는 얼마동안 먹고사는데 큰 도움이 된 셈이다 얼마 후 그는「로스니」씨의 조선 고전문학작품『춘향전』번역에 기초적인 요소들을 제공했다. 「로스니」씨는 번역작업 중 그의 공저자로서의 슬기로운 착한 마음을 높이 평가했다.
우리는 이시기에 만날 기회가 뜸해졌다. 우리가 다시 만났던 것은 그가 조선으로 떠나기 얼마전으로, 우리는 그의 귀국여비를 만들어 주어야했다. 이때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잡지발행인이 다시한번 대단한 호의를 베풀었던 것이다.
1893년12월 22일, 홍종우가 묵었던「호텔」의 「보이」가 작별인사를 했다. 『이 촌뜨기하고 함께 지내느라고 혼났읍니다. 내가 5개월 동안 「서비스」했는데도 그는 동전한푼 준적이 없어요. 이 사람과 같은 고객만 만난다면 참 불행이지요!』
홍종우는 조선으로 돌아가기 전에 일본에서 얼마간 머무를 예정이었다. 그는 「세르팡트·호텔」을 나서면서 그의 편지가 이곳으로 계속 오면 주일본 「프랑스」 공사관으로 보내달라고 일러두었다. 「호텔」의 여자주인이 『시원하다, 시원해!』 라고 대답했다. 왜시원한가? 홍은 길에 나와 돈지갑을 꺼내더니 5「프랑」짜리 동전 하나를 말없이 서있는 「보이」에게 주는 것이었다.
짐은 이미 마차에 실려있었다. 내가 마거에 올라타지 않는데도 그는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그는 홀로 떠날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헤어져야만 했다. 악수. 『또다시 봅시다』라고 내가 말하자 그도 『또 봅시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오! 무한한 회의속에 항상 긴장한 정신의 가인종!
「프랑스」 에서 가장 좋은 것이 뭐냐? 고 묻자,
-「마르세유」에 처음 도착하면서 말(마)을 보았는데 아주 큰 것 같았다.
그러면 나쁜 것은?
-이기주의.
2년여 동안이나 먹여살려 준 은인들에게 조금도 서슴지않고 하는 대답이었다. 그는 내가 마지막 선물로 준 금촉 만년필을 갖고갔다. 마차가 길 모통이를 돌아갔다. 담배를 꼬나문 홍종우는 그의 길다란 희색 한복차림에 똑바로 앉아서 곁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어느 날엔가 사람들과 그의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로부터 직접 소식을 들으리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었다.
6개월 후 (1894년1월)새해를 맞아 나는 다음과 같은 글과 함께 연하장을 받았다.
『압호 「니시무라·호텔」.
친애하는 벗에게.
몇자 적어 보냅니다. 일본에 도착하면서 병에걸려 오래 전부터 몸져 누워있소. 그래서 지금까지 편지를 보내지 못하였다오. 아직 조국에 돌아가지 못했소이다. 저의 부친과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고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되었소.
벗이여! 결국 나의 가여운 아내가 지난5월에 세상을 떠나버렸소. 그래서 걱정이 많았다오 .아직도 몇 달간 이곳에 있어야겠소. 이만 줄입니다.
벗이여, 근하신년. 당신의 충실한 벗.』 홍종우를 의심한 내가 잘못이었다. 만일 내가 조선어로 편지를 쓴다면 내친구가 불어로 써보낸 편지보다 월씬 더 못쓸 것이다. 이제 그는 이름을 Hong Djuong Ou 라고 썼다. 「프랑스」에 그가 도착했을 때 그의 이름은 Houng Jeong Ou 였었다. 아는 계속 houng joung Ou 라고 쓰리라.
그해4월 홍종우는 일본에 있지 않았다. 조선에도 가지 않았고‥. 그는 중국의 상해에 있었다. 홍종우는 군주의 적인 김옥균을 제거해버릴 목적으로 금을 상해로 유인해갔다. 그는 아무런 위험없이 권총 몇발로 범행을 저질렀다. 만일 일본에서였다면 일이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처벌되지 않을 것임에 틈림 없었다. 일본인들은 피신해온 모반자 금을 나쁘게 보지 않았으며 연금까지 주었다. 반면 중국인들은 조선왕의 명령대로 처리했다.
최근 「뉴스」. 5월21일자 「차이나·텔리그래프」-『천진주재조선령사 서씨가 4월16일 상해에 도착, 그날로 통역을 대동하고 푸른색 공용교자를 타고가 중국검사를 만났다. 서령사는 살해당한 김옥균의 시체와 살인범 홍종우를 동시에 인도해 줄것을 요청하기 위해 검사를 방문했다. 그는 이들을 모두 서울로 이송할 목적이었다.
오랜 협상 끝에 검사와 지사는 조선측의 요구에 동의, 중국선「웨이칭」으로 하여금 그다음날 제물포로 떠나도록 명령했다. 살해된 시체를 운반한 이 선박에 살인범이 무장경비원의 호위를 받으며 교자를 타고 승선했다.』
같은 신한.『상해에서 접수된 공보에 따르면 김왕균의 시체는 서울에 도착하자 여덟도막으로 잘려서 조선8도에 분산하기 전 일반에게 공개했다고 한다.
가슴은 교수대 밑 먼지속에 누워있고 사지는 그 위에 못박힌 채. 그후 토막난 시체는 각기 호위를 받으며 목적지로 보내졌다. 왕의 권위에 앞으로도 반역하는 자가 없도록 경고하기 위함이다.』
또 다른 「뉴스」는 사후 사형을 다시 집행했던 날 왕은 마치 이날 있었던 사건을 축하하기라도 하듯이 외교사절들에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김옥균 암살범에게 어떤 보상이 내릴 것인지는 아직 알려진바 없다!
나의 친구 홍종우는 잘있다!
추기
홍은 귀국후 김옥균 살해의 공으로 민비 지배시대의 홍문관 교리가 되고 세도를 누렸으며 1898년엔 황국협회조직에 가담, 보부상을 동원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습격하는 등 수구파정권 응호를 위해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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