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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세우기 외교 시대는 끝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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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정종욱 전 주중 대사는 국내 중국연구소들의 백화점식 운영과 행사 위주의 프로그램 탓에 지식 축적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변선구 기자]

정종욱(74) 전 주중 대사는 국내 중국 연구의 영원한 현역으로 통한다. 1971년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의 방중에 자극 받아 미 예일대에서 중국 관련 박사 논문을 쓰기 시작한 이래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화두는 중국을 벗어난 적이 없다. 김영삼 정부 시절 관료로 5년 정도 외도한 것을 제외하곤 서울대와 아주대·동아대 등 대학에서 줄곧 중국을 공부하고 후학을 양성해 왔다. 그런 그가 최근 자리를 옮겼다. 국내 중국학의 본산을 꿈꾸는 인천대(총장 최성을) 중국학술원 원장에 취임한 것이다. 지난 16일 중앙일보 7층 회의실에서 그를 만나 우리의 중국 연구와 한·중 관계 현안에 대해 물었다.

 - 국내에 유명 중국 연구기관을 꼽기 힘들다. 무엇이 문제인가.

 “많은 중국연구소가 열악한 재정과 부족한 인력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정치·외교안보·경제 등 모든 분야를 다 다루려는 백화점식 운영을 해온 게 가장 큰 문제다. 또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는 세미나 개최 등 행사 위주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니 중국과 수교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중국에 대한 지식 축적과 인재 양성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식 축적은 남의 연구 내용을 빌리는 모방→자기의 현실을 연구에 반영하는 수정→독창적 결과를 내놓는 창조의 단계를 밟는데 우리는 현재 수정 단계에 진입한 상태다.”

 - 인천대 중국학술원이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나.

 “한·중 관계는 3.0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상품 교역의 1.0 시대와 인적 교류의 2.0 시대를 거쳐 지금은 양국 국민 간의 믿음을 쌓아가는 심적(心的) 교류의 시기를 맞았다. 인천대 중국학술원은 산하에 있는 중국화교문화연구소, 중국연구소, 중국교육연구센터, 중국법률지원센터, 중국자료센터 등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중국의 정치·경제·사회 조직 등을 움직이게 하는 질서를 파헤칠 계획이다. 이는 상대의 마음을 읽어야 하는 한·중 관계 3.0 시대에 꼭 필요한 작업이다.”

 -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내달 방한할 것으로 예상된다. 어떤 성과를 기대하나.

 “두 가지다. 하나는 북핵 등 한반도 문제에서 돌파구가 마련돼야 한다. 북한은 앞으로도 핵 개발과 시험을 계속할 가능성이 높다. 현 상태로선 긴장이 고조될 뿐이다. 북한을 회담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우리가 좀 더 유연한 입장을 가질 필요가 있다. 6자회담이 재개된다면 그 틀 안에서 한·중이 협력할 공간이 넓어질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에 대해 한·중이 한목소리로 경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 시진핑 시대 들어 북한에 대한 중국의 태도는 얼마나 변한 것인가.

 “중국의 DNA까지 바뀐 건 아니다. 중국도 북한의 급변사태를 대비하고 있고 또 북·중 간 전략적 유대가 약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이 북한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지난달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한·중 경제협력이 강화되는 걸 환영하지만 한국의 안보와 번영의 기초는 미국’이라고 말했다. 이는 한·중 관계에 대한 견제 발언이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다.

 “이제 누가 누구의 줄을 세우는 줄 세우기 외교 시대는 지났다. 냉전시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중 동반자 관계와 한·미 동맹 관계는 제로섬(zero-sum) 관계가 아니다. 한·미 관계는 이미 성숙 단계에 와 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역사가 일천한 한·중 관계가 앞으로 더 중시를 받고 또 발전할 가능성과 폭이 넓다. 미·중 관계도 갈등 요인이 30%라면 협력 요인은 70%일 정도로 대립보다는 상호 윈윈을 추구하고 있다. 한·중 관계를 발전시키는 게 미·중 관계에도 도움이 된다고 본다.”

글=유상철 중국전문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정종욱=1940년 출생. 서울대 교수로 있던 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 공직에 입문해 96년 초부터 98년 봄까지 제3대 주중 대사를 지냈다. 재임 중인 97년 발생한 황장엽 망명 사건을 매끄럽게 처리해 주목을 받았다. 국내 1세대 중국 연구자로 꼽히는 그는 공산 중국을 만들고 지키고 발전시킨 세 사람의 지도자인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 덩샤오핑(鄧小平)에 대한 3부작 집필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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