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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없는 불청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미국 「텍사스」에서 반갑지 않은 손님이 왔다. 이름은 「텍사스 A형 인플루엔저」. 보건당국은 이 불청객을 맞아 전국에 경계령을 내렸다.
「인플루엔저」의 정체는 1㎜의 1만분의 1에 불과한 육안으로는 보이지 조차 않는 「바이러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은 흡사 거구의 악마와도 같다.
20년 내지 30년의 주기로 이 소악마는 계절풍처럼 세계를 휩쓸고 다니며 무수한 인명을 앗아간다. 1918년의 「스페인·인플루엔저」는 인류의 반수에 가까운 2천만 명의 생명을 빼앗아갔었다. 이 숫자는 그 무렵에 끝난 1차 세계대전의 전사자 수보다도 많았다.
20세기에 접어들어 다시금 악명을 떨친 「인플루엔저」는 우리에게도 낮설지 않은 「홍콩·인플루엔저」. 1968년부터 용명(?)을 떨치기 시작한 이 「바이러스」는 10개월 사이에 세계를 일주, 지구인의 절반쯤을 몸져눕게 했었다. 이웃 일본에서는 2천명이 생명을 잃었다.
「인플루엔저·바이러스」는 여권도 없이 세계의 어느 곳이나 자유롭게 넘나든다. 더구나 인구가 과밀해지고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또 교통량이 늘어남에 다라 그 유행의 속도도 빨라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바이러스」가 서울에 오는 시간은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이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왁친」을 만들어 대비하면 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탁상공론에 그치기 쉽다. 문제의 「바이러스」형에 대항할 수 있는 「왁친」을 대량으로 생산·공급하는데는 적어도 3개월은 걸린다. 선진국의 경우가 그 정도인데, 우리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미리 대비하고 있으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바로 여기에 고민이 있다. 「바이러스」는 변형이 빠르며 때로는 돌연변이까지도 일으켜 어떤 형의 「바이러스」가 탄생할지 도무지 예측을 할 수 없다.
엊그제 유행하던 「홍콩·바이러스」가 어느새 「텍사스·바이러스」로 변환 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홍콩·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왁친」은 이젠 쓸모가 없게되었다.
만일 어느 과학자가 「돌연변이」에 대비하는 「예상변이」를 알아낸다면 그야말로 「노벨」상을 받고도 남는다. 이것은「인플루엔저」를 미연에 예방할 수도 있게 할 것이다. 이를테면 그런 「예상변이」 「왁친」은 「바이러스」의 여권에 「비자」와 같은 구실을 할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인류는 달나라에도 오고가면서 1㎜의 1만분의 1에 지나지 않는 미물중의 미물인 「바이러스」엔 꼼짝을 못하는 꼴이다. 우리는 별수 없이 자연의 섭리에나 맡기고, 평소부터 건강에 유의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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