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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늦더라도 정확하게 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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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일호
이화여대 교수·미학

LA에 온 지 다섯 달이 됐다. 30년 만에 만난 고향 친구와 회포를 푼 적이 있었다. 그 친구 처음에는 고생도 많이 했단다. 지금은 작은 회사를 운영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지만, 조국에 대한 애틋한 사랑도 갖고 있었다. 마음이 푸근해졌다. 기아자동차와 현대자동차가 거리를 달리는 모습을 볼 때, 전자제품 매장에서 삼성 로고가 붙은 유니폼을 입고 필자한테 열심히 설명하는 미국인을 봤을 때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 LA 다저스 야구장에서 미국 사람들이 류현진에 대해 말할 때와 소치 겨울올림픽에서 김연아를 응원하는 미국 사람들과 함께했을 때는 뭉클함이 있었다.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라는 미국 한복판에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존재감이 주는 자신감이랄까.

 반면에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많이 겪는다. 운전면허증 하나 발급받는데 3개월이 걸렸다. 캘리포니아 재정이 열악해서 인원을 감축했기 때문이란다. 그래도 그렇지, 인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게으름의 문제인 것 같다. 월세나 모든 공과금은 수표에 금액을 쓰고 사인하고 우표를 붙여 편지봉투에 넣어 보내야 한다. 1970년대에도 이렇게 했었다는데 컴퓨터가 발달한 지금도 이렇게 하고 있다. 참 비효율적이다. 아이 학교의 사물함에 있는 잠금장치는 우리는 잊어버린 다이얼 방식으로 돼 있단다. 난생처음 보는 이 잠금장치에 놀란 아이에게 여러 차례 설명을 해주어야 했다. 이렇게 느리고 불편한 일들을 여기저기서 만난다. 이런 방식으로 큰 미국사회가 유지될 수 있을까? 신기하고, 조금은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을 태운 세월호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걸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우리의 또 다른 현실이 있었다.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들이 허망한 신기루였나 하는 회의가 들었다. 손주 같은 아이들을 배 안에 둔 채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선장과 선원들, 아이들이 물속에 빠져 죽는 것을 보면서도 우왕좌왕하는 공무원들, 이 상황에서도 서로 남 탓만 하는 비겁함, 속속 드러나는 거미줄처럼 얽힌 검은 이익의 사슬들 등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추악함의 모든 걸 우리는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경제발전이라는 겉껍질 안에 이런 속살들이 담겨 있었다니. 한편에는 자랑스러운 한국인들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엔 아주 더러운 인간의 모습도 있었다.

 어디서부터 문제일까? 미국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그 친구가 말한다. 정부가 그렇게 무능하지도 않고, 사회와 국민이 이런 일을 용납하지도 않는다는 거다. 그러면서 하는 말. 미국은 시스템으로 움직여지는 사회라고 했다. 문제가 있는 배가 검사에 통과할 수도 없고,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선장이 있을 수도 없으며, 국가를 위한 일이면 여당도 야당도 당리당략을 따지지 않고 힘을 합치는 일이 당연한 것이 되게 하는 시스템 말이다. 개인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공동체나 지역사회나 국가라는 조직의 유지를 앞서 생각하게 하는 시스템 말이다. 우리는 빠름에 너무 익숙해 있다. 그러다 보니 대충이란 문화에도 익숙해 있다. 좋은 게 좋다는 온정주의적 느슨함도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의 시스템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고, 고장 난 채로 기능도 못 하고 있다.

 대통령은 ‘공무원들의 철밥통’ ‘과거부터 쌓여온 적폐를 끊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이런 사실을 대통령은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일까? 그렇다면 정치인으로 보낸 세월은? 대통령부터 달라져야 한다. 한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움직여지는 사회, 그 시스템이 신뢰를 주고, 그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모두가 원칙을 지키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안전만 문제일까? 청와대 상공으로 무인 정찰기가 날아드는 국방은? 무슨 일만 있으면 바뀌는 교육정책은? 관광업 진흥을 위해 학교 주변에도 호텔을 짓게 하겠다는 발상은? 모든 곳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좀 늦으면 어떤가? 이젠 좀 늦더라도 정확하고 바르게 가자. 우리의 속살이 여기까지가 아니라고 필자는 간절히 믿고 싶다.

박일호 이화여대 교수·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