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7)"문화를 꽃피워 문명을 살찌운다"|불 「소르본」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본사 주섭일 특파원 「포랭」총장 인터뷰>
「프랑스」인은 일반적으로 물질적 풍부만을 만끽하는 미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문화적 전통을 갖지 못한 물질문명은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메커니즘」으로 본다. 한나라의 부는 비단 경제적으로만 따지는 것보다는 역사적으로 면면히 이어온 문화적 유산과 이에 대한 수용 및 발전의 측면도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양식은 빵만이 아니라 문학·예술·철학 등 문화로써 충족되지 않으면 동물처럼 의미가 없다는 논리다. 『가장 위대한 문화와 그 국제적인 「센터」가 오늘날 「소르본」에 자리잡고 있다. 「소르본」은 고등교육의 지속과 사명의 다양성을 동시에 증언한다. 그 이름은 사상을 행동화하는 「심벌」로 길이 남을 것이다.』

<완벽한 대학의 자유 누려>
「폴·르네·바쟁」교수가 이같이 정의한 「파리」-「소르본」대학교를 찾아 윤리학과 정치학의 세계적 권위인 「레이몽·포랭」 총장으로부터 「프랑스」문화와 정신의 지주인 「소르본」의 모든 것을 들어보았다.
-「소르본」의 교육목적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가장 자유로운 방법으로 대학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의 사명이란 것은 진리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탐구,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문명의 창조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열성을 지니고 우리 문화와 전통을 한데 모아 유지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 교육은 문화창조에 공헌하며 인간생활의 발전에 기여한다.』
-68년 5월 혁명이후 대학의 자유가 위협 당하고 있다고들 하는데…
『「프랑스」에 있어서 대학의 자유는 아직은 위협받고 있는 단계가 아니다. 국가나 정부 또는 어떠한 경제·사회적인 압력단체에 의해서도 우리의 자유는 조금도 침해되지 않는다. 우리는 완전한 대학의 독립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는 완전한 독립성 속에서 진리가 가장 고귀하다는 정신으로 각자의 의사를 존중하며 강의하고 연구하고 있다. 또 우리는 학생의 자유를 존중한다. 대학의 과업이란 학생의 구조화를 단호히 거부하고 자유정신을 형성시켜주는데 있는 것이 아닐까.』
-「소르본」의 교육방법은?

<연 2백명의 국가박사 배출>
『우리는 우리 문화연구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있다. 이 연구를 가장 잘 달성하는 방법은 대학간의 경쟁과 동시에 학생들끼리 경쟁하는데 있다고 나는 본다. 「소르본」은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대학 중의 하나이며 문학·예술·철학·자연과학 분야에 있어서 연구와 창조의 첨단을 걸어왔다.』
-결국 미국의 「하버드」대학과 무엇이 다른가?
『나는 「옥스퍼드」나 「하버드」를 자주 방문했는데…당신의 질문은 참으로 어렵다. 현실적으로 문제는 대학의 개성이라고 본다. 우리는 「옥스퍼드」보다 역사가 오래지만 대학사상 재정적인 부를 지니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버드」같은 자금「소스」를 갖지 못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고도의 문화를 지키는 대학일 뿐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문화와 자연과학 전반을 의미하며 또 이것은 우리 대학의 전통에서 온 것이다. 또 「소르본」은 바로 「프랑스」정신을 전문화하는 작업이며 그 표현이기도 하다. 이 같은 작업이 국가에 공헌한 바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형적인 것이며 또 무한한 것이다. 나는 「소르본」을 어떻게 정의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다. 여하간 「소르본」은 가장 「프랑스」적이라는데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졸업생수는?
『너무나 오랜 대학이라 양적인 통계를 잡기 어렵다. 다만 현재 재학생이 2만여명이고 외국 유학생은 2천 8백여 명이다. 매년 3천 5백여명의 학사와 2백여명의 국가박사를 배출하고 있다.』
-「소르본」의 창설이념은 무엇인가?
『10세기에 일곱개의 자유예술을 연구하기 위해 「센」강 속의 「시해」섬에 세워진 것이 기원이다. 문학부의 문법·수사학·변증법과 과학부의 수학·지리·천문학·음악이 칠예였다. 그러나 그 후에 「소르본」은 칠예탐구의 학풍을 이어받아 창설되었다.
고해신부 「로베르·드·소르본」이 1258년에 20명의 학생으로 오늘의 「소르본」자리에 개교했던 것이다. 창설정신은 「생활을 사회화·집회화·도덕화·학구화하자」는 것이었다. 그가 1274년 사망했을 때 이미 「소르본」대학은 이론정립의 대학「센터」로 유명해져 있었다.

<두 지주 「파스퇴르」와 「위고」>
그러나 너무나 전통에 집착, 문예부흥을 거부함으로써 「라블레」와 「몽테뉴」같은 「휴머니스트」들의 비판을 받았고 「프랑스」 대혁명 때도 너무나 정부에 협조적이었다는 이유로 폐쇄되어 1801∼1821년간 미술관으로 화하기도 했다. 혁명은 또 대학건물을 파괴해버려 오늘의 건물은 1884년에 복구된 것이다. 혁명의 상처는 68년 5월 혁명을 통해 독립과 학문의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구조로 확립된 셈이다.』
-68년 혁명 후 「소르본」이라는 이름을 없앴다고 하는데?
『학생혁명 이후 대학은 완전히 재분류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파리」-「소르본」이라고 옛 이름을 지니고 있다. 다만 71년에 이공분야가 「파리」제6대학으로 옮겨갔다.』
-학생들의 현실참여를 어떻게 보는가?
『우리는 학생들이 대학의 방향과 같은 길을 걸어주기를 강력히 바란다.
대학은 조직적인 항의로 방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장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협력적인 정책은 학생들을 최대한 「캠퍼스」 생활에 참여케 하고 대학의 과업을 확대하는데 있다.』
-결국 「소르본」의 미래상은?
『문화의 질을 고도화하고 그 효율성을 확인하는 데 있다. 우리의 심오한 학문의 탐구를 문화와 동시에 과학적 수준에 적용하자는 것이다.
즉 연구 결과를 문화에 적용하는 것이다. 「소르본」대학생들은 우리 문화를 창조하고 획득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도구를 발의하게 될 것이다.
「소르본」의 「캠퍼스」안에 두 개의 동상이 굽어보고 있다. 과학을 대변하는 「파스퇴르」와 문학의 「빅토르·위고」로 이 나라의 지성의 상징이다.
이들은 바로 「프랑스」의 문화적 유산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며 「소르본」은 바로 그 자유정신과 문화와 지성을 현실에 적용함으로써 이를 생활화하고 발전시키는데 기여하고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프랑스」가 자랑하는 무형의 부이며 오늘날 세계의 문화「센터」로 해마다 2천여만명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문화적 바탕이 된다.』

<사진 이창성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