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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쑥쑥~ 고개 내미네 죽죽~ 솟아 오르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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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 죽향 담양에서는 죽순이 쑥쑥 돋아난다. 이른 아침, 삼다리 대숲에서 만난 맹종죽 죽순이 이슬을 잔뜩 머금고 있다.

대나무의 계절이다. ‘새끼 대나무’ 죽순이 온 나라의 대숲에서 바스스 올라오고 있다. 4월 말부터 6월까지 죽순은 지상으로 툭툭 솟아 머리를 내민다. 그리고 30~40일 만에 키가 다 커버린다. 대나무는 보통 20m까지 자란다. 대나무자원연구소 이송진 연구사는 “죽순은 처음 땅에 돋아나고 20일 뒤부터 폭발적인 속도로 자란다”며 “2012년엔 담양에서 하루 만에 125㎝ 자란 죽순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 달 만에 성장을 끝낸 대나무는 그 자리에 서서 50년을 산다. 그리고 명을 다하는 순간에 꽃을 피운다. 더 이상 땅에 영양분이 없거나 병들었을 때 꽃을 피워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해서다. 장렬한 마지막 몸부림이다.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갓 고개를 내민 대나무, 다시 말해 죽순을 보고 싶었다. 전남 담양으로 내려간 건 당연했다. 예부터 담양은 죽향(竹鄕)으로 이름이 높았다. 담양에 머물렀던 수많은 묵객이 입을 모아 대나무를 노래했고, 참빗·바구니 등 대나무 공예품 생산도 활발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죽세공예품 수탈을 위한 철로가 담양 한복판에 깔렸고, 1980년대를 지나면서는 플라스틱의 보급과 중국산 죽제품 수입으로 대나무 산업이 쇠락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대나무가 다시 주목을 받은 건 2000년대 들어 숲의 가치를 발견하면서다. 도시에 지친 사람들이 담양을 찾아 대숲을 걸었다. 담양의 대표 대숲인 죽녹원에는 지난해 120만 명이 입장했고, 지난 3∼6일 4일 동안에는 약 8만 명이 방문했다. 담양에는 대숲 말고도 신록의 품에서 호젓하게 봄을 만끽할 곳이 많다. 소쇄원만 가더라도 동양식 정원이라는 원림(園林)의 진수를 목격할 수 있다. 담양에는 낙향한 선비가 지은 정자가 10개가 넘는다. 담양의 정자는 하나같이 자연에 기대어 들어서 있다. 앞에는 실개천이 흐르고 뒤로는 아늑한 산자락이 감싸고 있다. 봄바람이라도 불어오면 대숲 쓸리는 소리가 낭랑히 울린다. 봄이 짧다. 도시에서는 벌써 에어컨이 돌아간다. 400여 년 전에 살다간 시인처럼 선선한 바람 쐬며 유유히 산책하고 싶다면, 이 봄 다 가기 전에 담양을 들러보시라 권한다.

대나무는 한 달 만에 10~20m까지 자라 무성한 숲을 이룬다. 하루 만에 125㎝까지 자랐다는 기록도 있다.

나무도 풀도 아닌 것이, 한 달 만에 20m 다 자라요
댓잎 소리 낭랑한 ‘죽향

5월 담양의 대숲은 시끄럽다. 댓잎끼리 비벼대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숲을 울린다. 한 달 만에 수십m씩 죽순도 쑥쑥 자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담양의 대숲을 거닐며, 죽순 돋아난 풍경을 담아왔다. 대숲 못지않게 그윽한 조선시대 원림과 정자 이야기도 전한다.

하루에 1m씩 자라다

“죽순 올라왔나요?” 담양군청에 처음 전화를 한 건 4월 중순이었다. “글쎄요. 보통 1~2주는 더 지나야 올라오는디 아직 잘 모르겄네요.” 다시 담양의 대나무 전문가를 찾았다. “올해는 날이 더워 빨리 올라와부렀습니다. 벌써 1m 넘게 커쁜 녀석도 있습니다.”

바로 짐을 챙겨 경부고속도로에 올랐다. 혹시나 죽순이 너무 커버린 건 아닐까 마음을 졸였다. 이번 담양 여행의 주인공, 죽순이 땅을 뚫고 올라오는 찰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죽향(竹鄕). 담양IC를 빠져나가 담양군 안으로 들자마자 대나무 고을을 알리는 표지석이 반겨줬다. 우선 죽녹원부터 찾았다. 과연 대숲 사이사이에 가만히 고개를 내민 녀석들이 보였다. 한데 녀석들은 하나같이 흰 가루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혹 곤충이나 병해로부터 제 몸을 지키려는 분비물일까 싶었다. 군청 직원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사람들이 몰래 돌라가븐께 저라고 밀가루를 뿌려놓은 것이지라.” 사실 죽녹원만이 아니었다. 담양의 대숲 곳곳에는 ‘CCTV 촬영 중’ ‘죽순 채취 시 벌금 1000만원’ 등 살벌한 안내판이 걸려 있었다.

하릴없이 발길을 돌렸다. 대신 행락객이 많지 않다는 삼다리 대숲을 찾았다. 서늘한 숲으로 들어서자마자 푸른 대나무 사이사이에 꺼뭇꺼뭇하게 솟아난 죽순이 눈에 들어왔다. 대나무는 종에 따라 죽순 나는 시기가 다른데, 가장 먼저 올라온 맹종죽이었다. 어떤 녀석은 갓 땅을 비집고 나와 빠끔 고개를 내밀었고, 어떤 녀석은 벌써 사람 키보다 두 배 이상 자라 있었다. 회초리처럼 가녀린 것부터 천하장사 종아리처럼 굵다란 것까지 굵기도 제 각각이었다.

죽순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 두 가지. 죽순은 땅을 뚫고 나올 때 굵기가 완전히 자랐을 때까지 유지된다. 그리고 20~30개의 마디를 다 품고 태어난다. 자라면서 마디 사이사이가 넓어질 뿐이다. 저 작은 몸뚱이에 악기도 될 수 있고, 무기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오롯이 품고 태어나는 거다.

땅에 바짝 엎드려 한 뼘 크기만큼 자란 죽순을 들여다봤다. 밥상에서 만났던 매끈한 노란 색과는 거리가 멀었다. 짙은 갈색 껍질에 솜털이 돋아 흡사 동물 가죽 같았다. 풀도 아닌, 나무도 아닌 녀석에게서 생물성이 느껴졌다. 그 안에 뜨겁고 단단한 생명이 자라고 있다니 왠지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댓잎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죽림욕을 즐기면 심신이 맑아진다.

죽림욕을 즐기다

담양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나무 이야기를 전설 들려주듯이 풀어냈다. 관광해설사부터 대나무 전문가, 심지어 식당 아줌마까지 레퍼토리는 비슷했다. 그중에서 대숲을 관리하는 촌로가 들려준 이야기가 압권이었다.

“요, 요, 대나무 뿌리 좀 보소. 즈그들끼리 징하게 엉켜 있어서 폭탄이 떨어져도 끄떡 없당게. 6·25 때 대나무 뿌리 밑에 굴 파고 숨은 사람들은 다 살았다잖어.”

실제로 대나무는 뿌리가 수백 가닥이 나고, 그 가닥끼리 단단히 엉켜 있어 강풍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 이런 과학적 사실보다 중요한 건 담양에서 대나무가 어느 나무보다 친숙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튿날 아침 일찍 삼다리 대숲을 다시 찾았다. 죽순이 하루에 1m까지 자란다는 사실은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하나 아침 이슬 머금은 녀석들의 모습만으로도 아쉬움은 없었다. 날이 건조했지만, 저 어린 대들이 숲의 습기를 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크려고 온 힘을 다해 비질비질 땀을 흘리고 있는 것도 같았다.

죽림욕(竹林浴)을 즐기기 위해 다시 죽녹원을 찾았다. 담양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숲은 단연 죽녹원이다. 왕대(참대)·분죽(솜대)·맹종죽 등 다양한 종을 볼 수 있고, 산책로 8개가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담양의 유명한 정자를 재현한 죽향체험마을도 볼 만하다. 한데 주의할 게 있다. 행락객이 들끓는다. 평일에도 주차장에는 관광버스가 진을 치고 있다.

조금 한가한 장소를 찾는다면 대나무골테마공원도 좋다. 2003년 죽녹원이 문을 연 뒤 인기가 시들해진 곳이다. 매표소에는 그 흔한 브로슈어 한 장 없었다. 홈페이지도 없고, 이정표도 부실했다. 하나 잘 정돈된 죽녹원에 비하면 숲다운 자연미가 있었다. 맹종죽·분죽·왕대 외에도 오죽·조릿대 등 다양한 대나무를 보며 한가한 산책을 즐기기에 좋았다. 입구에서 약수 한 잔 떠 마시고 숲으로 들어가니 댓잎 사각거리는 소리와 지빠귀 우는 소리가 화음을 이뤘다.

이 정도가 담양 대나무의 전부는 아니다. 담양에는 354개 마을 가운데 350개 마을에 대숲이 있다. 과연 죽향이라 할 만하다. 그중에서도 대전면 행성리, 담양읍 삼다리에 있는 대숲이 산책하기에 좋다. 인공적으로 조성한 공원에 비해 호젓하고 아늑하다.

`그림자도 쉬어가는 곳` 식영정.

죽향의 다른 이름 문향(文鄕)

숲이란 모름지기 사람의 손때가 덜 타야 본연의 매력이 있는 법이다. 이제야 우리는 힐링 타령을 하며 등산복 빼입고 숲을 헤집고 다니지만, 500년 전 선조는 진작부터 숲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담양 원림에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원림은 솔직히 낯설다. 우리에게 익숙한 건 정원이다. 하나 그 둘에 담긴 철학은 하늘과 땅 차이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정원이 인위적인 조경 작업을 통해 동산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면, 원림은 동산과 숲의 자연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칸과 정자를 배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간이 자연을 주무르는 게 아니라 겸손히 그 품에 깃드는 것이 원림의 미학이다. 이 미학은 담양 소쇄원(瀟灑園)에 가봐야 비로소 와 닿는다.

소쇄원에 들어서면 대숲 오솔길부터 펼쳐진다. 이어 버드나무가 하늘거리며 반겨주고, 장원봉에서 흘러온 계곡물이 졸졸 흐른다. 초가지붕 얹은 정자 대봉대에 앉아 소쇄원을 둘러봤다. 광풍각·제월당은 불규칙적으로 배치됐고 기우뚱한 돌담도 질서가 없어보였다. 하나 자리를 바꿀 때마다 전혀 다른 풍광이 열렸다. 계곡과 인공 연못이 자연스레 어우러지고, 돌담은 계곡물이 흘러들도록 아래쪽에 돌을 괘 열어두었다.

소쇄원을 만든 양산보(1503~1557)는 역사적 위인이 아니다. 17세에 급제했으나 스승 조광조(1482∼1519)가 기묘사화로 밀려나자 바로 낙향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미역 감으며 놀던 자리에 소쇄원을 가꿨다. 그러니까 소쇄원은 한량이 음풍농월을 즐긴 곳이 아니라, 꿈이 꺾인 한 젊은이가 세상과 단절하고 지냈던 한 서린 공간이다.

담양은 가사문학의 산실이었다. 조선 중기 시인들은 정자에 모여 교분을 나누고 시를 지었다. 증암천 줄기 따라 곳곳에 세워진 10개 정자가 그 무대였다. 식영정(息影亭)은 ‘그림자도 쉬어가는 곳’이란 이름처럼 운치가 묻어 있다. 송강 정철(1536∼1593)이 여기에서 ‘성산별곡’을 지었다. 너른 평야지대가 내려다보이는 면앙정(?仰亭)에서는 퇴계·율곡 등 당대의 석학도 내려와서 학문을 논했다.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이 탄생한 송강정(松江亭)은 소나무와 대나무가 조화를 이뤘다. 송강정의 다른 이름은 죽록정(竹綠亭). 400여 년 전에도 이 자리에 대나무가 우거졌다는 증거다.

담양에서는 다채로운 죽순 요리도 맛볼 수 있다.

여행정보=서울시청에서 담양까지는 자동차로 3시간30분 걸린다. 담양에 가면 대나무·죽순 요리도 맛봐야 한다. 지난 4월 대나무박물관에 죽순 요리 전문점 ‘안채’가 문을 열었다. 댓잎묵무침·죽순우렁초무침·죽순튀김 등이 나오는 기본 코스가 1만2000원이다. 061-381-5400. 담양의 대표음식 떡갈비는 50년 역사의 덕인관이 유명하다. 1인분 2만7000원. 061-381-7881. 대숲 에워싼 한옥에서 잠자고 싶으면 죽녹원 죽향문화체험마을(bamboo.namdominbak.go.kr)을 추천한다. 8만원부터. 죽녹원·대나무골테마공원 입장료 어른 2000원. 오는 6월 27~30일 죽녹원·관방제림 일원에서 대나무축제가 열린다. 내년 6월 27일부터 8월 15일에는 국내 최초로 세계대나무박람회가 개최된다. 담양군청 문화관광과 061-380-3151.

글=최승표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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