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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서 피겨 배우고파" 27년 전 소녀의 꿈 … 고르바초프에게 보낸 그 편지와 꿈같은 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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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아홉 살 때의 잘두아. 피겨스케이터의 꿈을 키우던 시절이다. [사진 리아노보스티]

소치올림픽 개최를 기념해 최근 러시아 모스크바에선 옛 소련의 겨울올림픽 참가 역사를 되돌아보는 전시회가 열렸다. 관련 문건들과 올림픽 영웅들의 사진들 사이에서 비뚤비뚤한 손글씨 편지가 눈길을 끌었다.

 1987년 피오나 잘두아라는 아홉 살 영국 소녀가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보내온 것이었다. “TV로 소련 선수들의 스케이팅을 보고 너무나 감동했어요. 제발 러시아로 가게 해주세요. 아저씨가 챔피언들에게 부탁해서 제가 스케이팅을 배우게 된다면 무지무지 행복할 거예요”라는 내용이었다. 페어스케이팅 커플의 앙증맞은 그림도 그려 넣었다.

 당시 잘두아에게 스케이팅은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불안과 아이들의 괴롭힘으로부터 유일한 탈출구였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고된 훈련을 버티며 러시아행과 스케이트 선수의 꿈을 키워갔다. 17세가 됐을 때 드디어 코치의 주선으로 러시아 유학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결국 무산됐다. 소련의 붕괴로 그를 가르칠 코치와 선수들이 모조리 서방으로 망명해버린 탓이었다.

피오나 잘두아가 러시아에서 스케이팅을 배우고 싶다는 꿈을 담아 고르바초프에게 보낸 편지.

 하지만 망명 사태는 그에게 새로운 인연을 선사했다. 자신이 연습하던 아이스링크에 세계 주니어 페어스케이팅 챔피언 출신의 드미트리 수하노프가 둥지를 튼 것이다. 잘두아는 수하노프와 짝을 이뤄 페어스케이팅 선수로 국제 대회를 누볐다.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의 강도 높은 소련식 훈련도 그에겐 즐거움이었다. 잘두아 커플은 부부가 됐다.

 잘두아는 지난해 말 꿈에 그리던 러시아 땅을 밟았다. 남편과 함께 아이스 쇼에 고정 출연하게 됐다. 그는 지난달 현지 언론사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자신의 편지가 전시되고 있다는 믿기 힘든 말을 전해 들었다. 확인 결과 고르바초프에게 온 편지 중 일부가 정부문서보관소로 옮겨졌는데 이번 전시 기획자가 잘두아의 편지를 발견해 전시한 것이다. 전시장으로 달려간 잘두아는 27년 전 자신의 꿈이 담긴 편지와 마주했다. “이게 어떻게 여기까지 와 있는지 모르겠다. 엄마가 정말 편지를 부쳤나 보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잘두아의 사연은 리아노보스티 통신에도 보도됐다.

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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