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화성인과 금성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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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미국인은 화성에서, 유럽인은 금성에서 왔다."- 얼마전 미국의 보수적 외교 전문가 로버트 케이건이 한 이 말이 전세계에 회자(膾炙)됐다. 국내 신문들도 '말말말'거리로 제격인 이 명언을 놓치지 않았다.

얼핏 이 말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생각이 마치 다른 별나라에서 온 것처럼 다르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러나 영어깨나 하는 사람들은 영어 단어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영어로 화성을 '마즈(Mars)', 금성을 '비너스(Venus)'라 부르기 때문이다. 마즈는 로마의 군신(軍神) '마르스'에서, 비너스는 로마신화의 사랑과 미의 여신에서 그대로 따 왔다. 주전(主戰)을 외치는 미국과 반전(反戰)을 호소하는 유럽의 모습을 이보다 더 절묘하게 짚어낸 표현이 있을까.

케이건에 앞서 화성과 금성의 이런 이미지를 써 먹은 작가가 있다. 1991년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쓴 미국의 존 그레이다.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던 이 책에서 저자는 서로 다른 사고와 행동양식을 가진 남녀가 어떻게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 가르치고 있다.

화성과 금성의 이런 이미지는 순전히 겉모습에서 기인했다. 산화철, 즉 녹으로 뒤덮여 붉은색을 띠는 화성은 예부터 전쟁이나 피, 재앙을 상징했다.

특히 1898년 H G 웰스의 '우주전쟁'이 발표된 이후 화성인의 침공은 소설이나 영화의 단골소재가 됐다. 1938년 오슨 웰스가 '우주전쟁'을 각색해 방송한 라디오 드라마를 사실로 착각, 1백만명이 공황(恐慌)상태에 빠지는 대혼란이 일기도 했다.

반면 해와 달에 이어 가장 밝게 빛나는 금성은 그 아름다운 자태로 사랑과 평화의 대명사로 불렸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과는 달리 금성의 자연환경이 화성보다 나빠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은 훨씬 낮다고 한다.

어쨌든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미국과 유럽의 관계는 전후 최악이라는 소리까지 나온다. 나름대로 관계회복을 위해 서로 노력 중이지만 결국 잇속을 놓고 다투고 있는 이들 '화성인'과 '금성인'의 화해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처럼 대서양 양안(兩岸)에서 대치하던 화성인과 금성인이 우리나라에도 나타났다. 이라크전 파병을 놓고 참전파와 반전파로 갈려 나라가 두 동강이 나는 모양이다. 미국과 유럽은 국가이익 때문에 다투는데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다투고 있을까.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