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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백여 년만에 햇빛 본『이조의 전쟁고발 문학』|『달천몽유록』의 내용과 문학적 가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김기동 교수에 의해 4백여 년만에 빛을 보게 된『달천몽유록』는『임진록』등 임진왜란을 다룬 저술들을 문학보다는 기록으로 간주할 경우 완벽한 소설형태로 씌어졌다는데 의의가 있다.
물론 이 작품 역시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작품의 무대나 전체적인 구성은 철저한「픽션」인 것이다. 김 교수에 의하면 작자 윤계선은 그 같은 거대한 역사적 사실을「픽션」화합으로써 정사가 다루지 못한 부분까지의 접근을 시도하려 했던 것 같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화자인 주인공이 꿈을 꾸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주인공인「나」는 조정으로부터 암행어사의 사명을 받고 호서지방을 순찰하는 도중 충주근처의 달 천에 도착한다. 그곳은 임진왜란 때 10만 대군이 몰살했던 곳이다.「나」는 임란당시를 회상하며 거닐다가 어느 숲 속에 이르러 문득 졸다가 꿈을 꾼다.
꿈속에서「나」는 커다란 나비의 안내를 받아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 이르게 된다. 그들은 혹은 팔이 잘리고 혹은 다리가 잘리고 목이 없는가 하면 허리가 동강나는 등 흉측한 모습을 한 귀신들로서 고통의 울부짖음으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다.
그때 강가에 한 전선이 나타나면서 한 장군이 내려선다. 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은 여러 장군들이 모여 앉아 있는 곳에 안내되어 상석에 앉는다.
고경명 최경회 김제갑 김천일 조 헌 김시민 신립 심대 영규 등 장군들은 이순신을 둘러싸고 앉아 임란 당시를 회상하면서 비분강개한다.
그러나 귀신이 된 병사들은 한 장군의 말이 끝날 때마다 비판의 합성을 지른다. 대체로 한 우두머리의 작은 실수 때문에 수많은 생명이 죽어 갔다는 것이다. 특히 달 천에서 10만 대군이 몰살했을 때의 장수인 신립의 이야기가 끝나자 병사들의 아우성은 극도에 달한다.
『그것은 신장군의 작전이 잘못됐던 탓이다. 천 추의 한이다』라는 합성이 사방에서 터져 나온다.
당시 신립은 조령에서 진을 치고 왜적을 막고 있었는데 여러 장병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려 평지인 달 천으로 후퇴, 배수진을 쳤다가 10만 대군이 몰살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전술상으로는 조령에서 왜적을 막았어야 했다.
신립이『그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자 여러 병사들은『변명하지 말라』고 꾸짖는다. 진주싸움 금산싸움도 병사들에 의해 호되게 비판된다.
이 작품에서 화자인「나」는 각 장군에 대해 개별적으로 인물명가를 한다. 이 같은 작중의 인물 평가는 아마도 그때 그 인물이 아니었으면 그 싸움에서 승전할 수 있었지 않았겠느냐 하는 암시의 뜻을 지닌다고 김 교수는 풀이하고 있다.
그것은 곧 오늘날의 고발문학의 형태에 비견되는 것이다.
즉 이 작품 속에서는 한 장군을 중심으로 각 전투에서의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면에서 보자면 임진왜란에서 조선왕조의 패배 원인이 암시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같은 전체적인 흐름 가운데서도 이순신의 공적은 매우 높이 평가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작자는 이순신의 인물에 대해서보 그 의연한 자세와 인간적인 풍모에 감격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는 작자 윤계선이 16세 때였으므로 작자가 전쟁을 전장에서 직접 체험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의 눈에 비쳐진 전쟁의 참상이 소설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병사들의 참상은 마치 당시의 현장을 그대로 재현시키는 듯 실감 있고 감동적이라는 김 교수의 설명이다.
어째 든 이. 소실은 병자호란을 비판한『강도몽유록』(작자미상)과 함께 이조시대 고발문학의 새로운「패턴」을 제시하는 것이며 전쟁사의 한 측면을 완전한 허구로 재현한 유례없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정규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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