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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선의 송환 문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이른바 「박동선 사건」이 문제된 지 벌써 1년이 다 됐지만 이 사건을 둘러싼 미국내의 물의는 시간이 갈수록 열도를 더해 가는 것 같다. 사건의 성격과 내막이 어떤 것이든 이제 미국에서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최근에는 박씨에 대한 연방대법원의 기소와 하원 윤리위의 본격적인 조사 착수로 박동선 사건에 대한 미국내의 관심이 최고조에 달한 느낌이다.
미국 정부는 최근 박씨의 인도를 한국 정부에 요청했고, 이에 대해 박동진 외무장관은 박씨를 본인의 의사에 반해 강제송환 할 수는 없다는 정부 입장을 밝혔다.
정부나 박씨 자신의 설명으로는 그의 미국내 활동은 공무가 아닌 순전히 개인적인 사업 활동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개인적인 일로 국가와 국민에게 끼친 누를 생각하면 박씨의 분별없는 행동에 대해서는 우리도 공분을 금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 국가에 누를 끼쳤다는 사실과 그를 범죄 행위지인 미국으로 인도하는 것과는 별개 문제다. 범죄인 인도 문제는 국제법과 국제 관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공권력 행사에 속하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한국 국민인 박씨에 대한 미국 정부의 인도 요청은 법적으로나 정치 도의적으로는 원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선 법적으로 볼 때 한미간에는 행정 협정 시행을 위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 양자간 또는 다자간의 일반적 범죄인 인도 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다. 범죄인 인도는 일반 국제법상의 제도가 아니라, 특별 국제법상의 제도이기 때문에 협정이 없는 한 범죄인 인도 의무는 발생하지 않는다. 더구나 박씨는 범죄인 인도 협정이 체결되는 경우에도 대륙법 계통의 국가에서는 인도 대상에서 제외되는 「자국민」, 즉 한국 국민이다.
설혹 다른 나라에서 죄를 범하고 도망해 온 경우라도 자국민은 범죄 행위 지국에 인도하지 않는 것이 속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대륙법계 국가의 일반 원칙이다. 국제법학에서 말하는 「자국민 불인도의 원칙」이다.
이 원칙은 보통법의 전통에 따라 속지주의를 취한 영·미 두 나라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18세기말이래 인정돼 온 일반 관행이다. 자국민 불인도 원칙을 조약·헌법(서독)·법률(일본의 도망 범죄인 인도법) 등에 명문으로 규정한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하나의 일반 원칙으로 받아들이는 게 보통이다.
이러한 사정을 모를리 없는 미국 정부가 박씨의 인도를 요청해 온 까닭은 무엇일까. 국내 정치용으로 한번 해본 것 일 수도 있고, 아니면 수원국인 한국이 감히 미국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겠느냐는 고압적 계산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분히 미국의 국내 정치를 의식한 전자의 경우라면 우리로서는 미국의 고충이 충분히 이해는 되나 남의 나라의 정치 흐름에 놀아날 이유는 없다.
더구나 후자의 경우처럼, 그것이 행여 고압적 자세에서 나온 것이라면 협조할 생각이 있더라도 협조하기가 곤란해진다. 주권국가로서의 자부심과 체통의 문제이다.
또 감정적인 얘기일 수도 있지만 작년말 김상근 참사관의 망명이 문제됐을 때 미국이 어떻게 했나를 생각해 보자. 우리 외교관의 망명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주미 대사의 면담 요청마저 미국측은 김 참사관의 의사를 내세워 거절하지 않았는가.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단순한 면담 요청과 국제 관례에도 없는 남의 나라 국민에 대한 인도 요청 중 어느 것이 더 무리한 요구이겠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정부가 우리 국민인 박씨를 본인의 의사에 반해 미국에 인도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당연하다.
다만 우리로서는 이로 인한 한미 관계의 악화, 특히 미 의회의 대한 분위기가 악화될까 봐 걱정이다. 이러한 「딜레머」를 해소하는 길은 박씨 스스로가 자신의 의사라면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뿐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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