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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독립군 야사 신일양<제55화>19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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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조도전대교수 강전씨 주선으로 조도전대법과전문부 청강생의 학적을 얻었다.
청강생이 되고 보니 주인 재등씨도 사정을 보아주어 왕진을 피하고 나에게 책 읽을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1주일에 3, 4시간씩 학교에 나가 강의를 들었다. 나는 하루 4시간 정도의 잠을 자고 열심히 공부했다.
2개월쯤 지나자 강전교수가 찾아와 내년의 정식입학을 위해 입학전형시험(청강생재적자에 한함)이 있으니 시험공부를 하라는 것이었다.
새로운 참고서를 마련해 밤을 새워 시험공부를 했는데 그 이튿날이면 인력거를 끌다 쓰러져 주인으로부터 야단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꼭 합격해야만 하겠다는 일념은 주인의 야단쯤은 능히 견디어 낼 수 있게 해 매일같이 밤을 새우다시피 했었다.
당시 재등병원에 예쁘장한 간호원이 있었는데 나를 측은히 생각했던지 환자용 「비타민」을 먹으라고 틈틈이 갖다주었다.
그때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 그 아가씨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12월에 있었던 시험엔 다행히 합격을 했다. 정말 기뻤다. 2백70여명의 청강생이 응시해 37명이 합격했을 뿐이었다.
재등씨 일가도 기뻐하면서 축하해 주었다.
해를 넘겨 1926년 3월3일, 나는 조도전대법과전문부에 정식입학을 했다. 입학식을 끝낸뒤 서울의 이승훈선생과 몇몇 동지, 그리고 고향의 부모님께 참으로 오랜만에 안부편지를 올렸다.
동경의 봄은 화사했다. 하루는 우구정에 있는 경도 「호텔」에 투숙한 여자손님이 심한 열로 고생을 한다며 왕진연락이 왔다.
재등씨를 태우고 급히 인력거를 몰고 「호텔」로 달려가 진찰을 끝냈다. 그리고 다시 재등씨 심부름으로 약을 가지고 「호텔」로 가 약을 전하고 용법도 일러주었다.
묘령의 환자는 대단히 고마와하며 사례금이라며 3원을 주었다. 아름다운 여인으로부터 사례금을 받는 것은 처음일이라 몹시도 당황했다.
그 뒤에도 그 환자는 몇차례 더 진찰을 받고 또 약을 전해주곤 했는데 그러는 사이 그 여자는 더 가깝게 대해주었다.
그는 인력거를 끌고 대학공부를 하는 고학생인 나에게 관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후일 나를 찾아 서울까지 와서는 결혼할 것을 간청했으나 나는 그럴 처지가 못되었고 또 해야할 일도 따로 있으므로 그 뜻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동경으로 돌아가던 그 여자의 모습은 일생을 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그해 5월 어느날 하오5시쯤 왕진거를 끌고 갔다오니 동경경시청내선과 고등계에 있다는 정모라는 형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너는 한국충주에 사는 신재덕씨의 장남 신일양이가 틀림없지?』 하고 물었다.
나는 당시 한국이름을 버리고 삼택이란 가명을 쓰고 있었다. 형사의 질문에 나는 『그렇다』 고 대답했다.
정형사는 나를 『부령선인』 이라고 지적하면서 주인 재등의사에게 경시청의 체포영장을 보이고는 나를 체포한다고 했다.
경시청으로 끌려갔다. 내 신분이 드러난 것은 고향에 송금한 일 때문이었다.
나는 월급과 환자들로부터 받은 사례금을 모아 일부는 학비로 쓰고 나머지는 모두 고향의 부모님께 송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향집에서 나의 동태를 감시하던 일경에게 탐지되어 나의 정체가 드러났던 것이다.
나는 동경 경시청에서 29일을 보낸뒤 경시청부총감이 판사자격으로 약식재판이 열렸다.
그 재판에서 『10연간 일본내지재류금지』라는 판결을 받았다. 결국 어렵게 입학한 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다시 쫓겨나야 하는 처지가 됐다. 나는 일본내에서 범법한 사실이 없음을 내세워 판결이 부당하다고 항변했으나 헛일이었다.
일본을 떠나던 날 재등 가족은 동경 신교역까지 배웅을 나와 주었으며 일금 삼백원을 주며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당부했다. 서울로 쫓겨온 나는 잠시 할 일을 잃은 채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다시 만주로가 독립운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결의만은 이때도 변함이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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