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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일념으로 살다간 야인|이상재 선생 50주기…그의 인간과 사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매년 3월29일로 월남 이상재 선생님의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나는 1927년4월7일의 장의행렬을 잊을 수가 없다. 일제의 학정이 계속 되면서 그 압정이 노골화했지만 이날 서울시가를 메운 10만여의 시민들은 모두 울음을 터뜨리며 난세에 민족 지도자를 잃은 것에 대해 애도했었다.
특히 이 장의행렬은 20대 청년이었던 나에게 일제의 압정 아래서 이에 굴하지 않고 젊은 청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데 막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더욱 잊혀지지 않는다. 이처럼 돌아가셔서까지 젊은 청년들에게 감화를 주신 월남선생은 1850년(철종원년) 충남 한산에서 태어나셨다. 당시는 국운이 기울어 정치와 과거제도 등의 부패가 극에 달해 선생은 과거에 급제할 수가 없었다.
우정국 주사·주미공사관의 1등 서기관으로 재직하면서는 물론, 관직 은퇴 후에도 야인적 기질을 견지하신 것은 선생이 보내신 청소년기의 부정부패에 대한 폐해를 뼈저리게 느끼신 때문이라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다.
내인이 바치려고 들고 온 매관첩지를 빼앗아 어전에서 불사른 일, 간신과 모리배들이 망국적인 전운사를 설치, 세미를 서울로 실어 오려는데 반대, 직제를 반포하지 않아 왕명을 어긴 일 등은 그의 야인적 기질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들이었다.
선생은 이 같은 야인적 성격 때문에 6명의 자손을 잃는 화액을 당했으나 성서에 나오는 의인 「욥」처럼 역경을 뚫고 독립구국을 위한 행동에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선생이 생전에 남긴 업적은 독립운동과 궤를 같이하며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그 첫째가 독립협회에서의 활동이다. 관에 재직시 미국에서 선진문물을 직접 보고 들었던 월남선생은 1896년 서재필 박사가 귀국하자 민중계몽운동을 조직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곧 독립협회를 함께 창립했다.
선생은 독립협회에서 부회장으로 재직하면서 독립신문발행·민중계몽으로 국민의 독립정신 함양을 위해 진력하셨다. 그러나 1898년 공화제를 음모했다는 무고로 협회가 칙령으로 해산되자 다시 제2의 활동인 YMCA의 청년운동을 시작했다.
YMCA에서 선생의 활동은 청년들에 대한 교육과 독립운동으로 요약된다. 선생은 『권고청년』이란 글에서 『우리 한국의 청년들은 들어보라. 오늘이 가고 명일이 가매 세월은 무한하게 한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니 청년이여 때를 놓치지 말고 부지런히 성사토록 노력하라』고 충고했다. 그의 이 같은 기본적 태도는 『다음대의 사회의 주인이 될 청년들은 지덕의 수양과 신체를 강건히 해 민족의 번영과 부강의 근본으로 삼도록』 『청년은 국가의 기초』라는 글에서 주장했다.
특히 월남 선생은 젊은이와 더불어 있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YMCA에서는 「노인청년」이란 별명으로 그를 대우하고 젊은이들은 선생을 반겼다.
한편 그의 구국을 위한 정치적인 노력은 신간회 활동을 통해 뚜렷했다. 1927년2월에 조직된 이 모임은 월남선생을 회장으로 모시고 당시 강력한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됐었다. 월남 선생은 신간회(본래는 신한회로 예정)의 강령을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구한다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고 정함으로써 선생의 의지를 신간회를 통해 구체화 시켰다.
이제 선생이 가신지 50년, 민족이 시련을 겪을 때마다 그 위업을 되새기게 되고 자주·독립을 강조하셨던 선생의 교시가 오늘날에도 아쉽고 새롭다.
◇필자=1898년 서울태생 ▲24년 일본경도대 경제과 졸 ▲26년 동대학원 수료 ▲27년 신간회 중앙위원 ▲33년∼60년 언론계 종사 ▲71년 세종대왕기념사업 회장(현) ▲74년 YMCA평의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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