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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충기 부장의 삽질일기] 씨앗폭탄을 던지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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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둔 이거 갖다 심어요.

한 달 전쯤 됐나보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가 작은 봉지 하나를 가져왔다. (정 기자와 나는 서로 사둔이라고 부르는데, 물론 웃자고 하는 소리다. 정작 아이들끼리는 얼굴도 모르니 말이다) 보니 씨앗 몇 개가 들어있었다. '씨앗폭탄 만들기 꾸러미'라고 쓰여 있었다. 아파트에 사니 마땅히 심을 데가 없어 삽질하는 내게 가져왔노라고 했다. 받아놓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며칠 전 창밖을 내다보는데 그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씨앗들은 책 더미 위에서 몸을 뒤틀며 오고가는 계절을 하릴 없이 구경만 하고 있었던 거다. 임옥상 작가가 보낸 씨앗이었다. "이제는 농사입니다... 늘 새해는 경이롭습니다. 씨가 더욱 큰 감동을 선사할 것입니다"고 친필로 쓴 종이 한 장이 봉투에 들어있었다. 벼,콩,고추,조,팥과 차지게 개어진 넓적한 진흙덩이 하나가 들어있었다. 그 옆에 콩 몇 알을 박아 놓은 진흙 쪼가리도 있었다.

'한바람' 임옥상, 시대의 대의 앞에 몸을 던져 살아온 작가다. 이제 삶의 지평을 농사로 넓혀가고 있는 모양이다. 80년대 민중 걸개그림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철수 작가도 20여 년 전에 제천 천등산 박달재 아래로 내려가 손톱 밑에 흙물 들이며 살고 있다. 민주화운동을 하던 이들이 나이 들며 생명을 찾아나서는 일은 이제 그리 낯설지 않다.

꾸러미에는 사용법이 친절하게 붙어있었다. 흙이 뭉쳐질 만큼 물을 섞어 손으로 조물조물한 다음 씨앗을 넣어 원하는 모양을 만들면 됩니다!

심심한 땅에 던져주세요. 당신도 게릴라 농부가 될 수 있고 풍성한 텃밭을 가꿀 수 있답니다!

파종 시기가 지나고 있는지라 살짝 걱정이 됐다. 요놈들을 어디에 심을까, 온갖 채소들이 움트기 시작한 내 밭의 빈틈을 찾았다. 씨앗 박힌 진흙쪼가리들을 여기저기에 꾹꾹 눌러 놓았다. 내 역할을 여기까지다. 이제부터는 저희들이 알아서 살아갈 뿐이다.

감자가 도톰한 잎을 내밀었다. 상추, 열무, 봄배추, 아욱... 바짝 마른 흙인데도 웬만한 씨앗들은 다 고개를 들었다. 한꺼번에 오글오글 올라오는 놈들을 솎아주었다. 제법 많이 뿌려놓은 대파는 삼분의 일 정도가 소식이 없고, 잔뜩 기대했던 고들빼기는 겨우 두 뿌리만 보인다. 모종으로 심은 상추 오크 케일을 처음 거뒀다. 네 집이 큼직한 봉지로 하나씩 담아갔다. 사나흘은 충분히 먹을 양이다. 밭둑에서 굵직한 고들빼기도 몇 뿌리 캐 담았다.

용석 군 석경 군, 직접 상추 따다 먹으니 좋지? 오이아삭이고추, 청양고추, 안 매운 고추, 호박, 오이, 방울토마토... 세일 군이 산 1만9500원 어치의 모종을 함께 심었다.

그런데 밭둑에 한창 올라오는 참나물을 무참하게 잘라간 자는 누구냐. 이런 우라질리우스 같으니라구.

꽃 진 자리에 여린 잎 돋고, 연둣빛 떠나가는 앞산에 녹음 짙어간다.

어미 아비 품을 떠나, 오지 못할 길 떠난 그대들 아니라면 이 얼마나 좋은 날이냐. 이 얼마나 꿈같은 날들이냐.

안충기 기자 newnew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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