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루빈스타인 90회 생일 맞아 서독매스컴 법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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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서독의 「매스컴」들은 최근 세기적인「피아니스트」「루빈스타인」옹에 관한 특집들로 법석이다.「나치즘」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루빈스타인」은 평생을 두고 독일 안에서의 연구를 거부해온 반독 음악가. 그러나 서독의 「매스컴」들은 마치「루빈스타인」대한 짝사랑처럼 그의 90회 탄신일을 맞아 일제히 호의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1914년 세계 제1차대전 중 고국「폴란드」와 화란에서 독일군대가 자행한 만행소식을 듣고「루빈스타인」은 『다시는 독일 땅을 밟지 않겠다』고 스스로 굳게 맹세했었다. 그 후 「나치」수용소에서 자신의 가까운 친척 여러 명이 학살된 후부터 유대계 「폴란드」인인 그의 독일파의 결별 결심은 한층 굳어졌다
그러나 「루빈스타인」이「피아니스트」로의 형성 과정에서 독일의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독일적 낭만을 누구보다도 많이 지니고 있는 그는 1906변 미국「데뷔」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고 이어 「파리」로 옮겨가 「프랑스」·「이탈리아」·영국을 예술활동의 주된 무대로 삼아 쇼팽의 탁월한 연주자로 활약해왔다. 수년 전「루빈스타인」은 독일국경과 접한 화란의 「나이메헨」에서 대부분이 독일사람으로 꽉 들어찬 관중 앞에서 연주를 한바 있었다.
여러 해 전에는 새 「피아노」를 고르기 위해 「함부르크」의 「스타인웨이」사를 들른 「루빈스타인」은 마음에 드는 「피아노」를 택해 거의 반 공개적으로 시험연주를 들려주어 그 자리에 있던 오랫동안 그의 연주를 갈망해온 독일사람들을 흐뭇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두 차례의 독일방문과 관련하여 그가 자신의 애초의 맹세를 깨뜨렸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독일에 대한 여러 가지 미련들을 의식적으로 피해가며 자신의 결심을 지켜온 그의 노력에 독일인들은 경의를 표할 뿐이다.
며칠 전 오랜 독감으로「파리」의 「아메리칸」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고있는 최근 소식에 접해 독일인들의 관심은 한층 더 높기만 하다. 【프랑크푸르트=엄효원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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