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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공부 잘했던 고2 자녀가 시험 불안에 시달려 걱정이라는 40대 주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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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40대 주부입니다. 고2 아들 성적이 너무 떨어져서 걱정입니다. 지난해 특목고에 입학할만큼 중학교 땐 성적이 상위권이었습니다. 성실한 모범생이라 걱정할 게 없었는데 지난해 1학기 중간고사를 망친 후 시험 때만 되면 불안해하고 공부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야단도 쳐보고 달래도 보는데 성적은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성적을 올릴 방법이 없을까요.

A 자녀가 좋은 성적을 받기 원하는 건 모든 부모가 똑같겠죠.

 좋은 성적을 위한 세요소를 뽑는다면 우선 공부에 대한 동기입니다. “우리 애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서 문제”라는 게 바로 동기 문제입니다. 공부가 재미없으면 아무리 머리 좋아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은 공부의 기술입니다. 효과적으로 지식을 이해하고 종합해서 기억한 후 시험의 요구 사항에 따라 끄집어내서 정답을 만들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시험을 잘 보기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그런데 준비를 철저히 했는데 시험 당일 실력 발휘를 못 한다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습니다, 준비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준비 단계에서는 누가 봐도 1등인데 시험을 망치는 학생도 꽤 있습니다. 만약 후자라면 시험불안이 심한 게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다수 학생이 시험 불안을 경험합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학생 25~40%가 시험 불안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적절한 불안은 오히려 수행 능력을 향상 시키지만 과도하면 수행 능력을 저하시켜 성적을 하락시킬 뿐 아니라 건강한 심리 발달에도 악영향을 끼칩니다.

 시험 불안은 보통 네종류 증상이 있습니다. 우선 생리학적 각성입니다. 두통과 속쓰림, 구토, 설사, 과도한 땀 흘림, 짧은 호흡, 어지러움, 빠른 심장 박동, 그리고 입 마름 증상 등입니다. 심하면 숨이 멈을 것 같은 공황 증상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걱정과 두려움입니다. 수학 문제를 다 못풀면 어떡하지, 앞 자리 학생이 내는 소리가 신경 쓰여 시험을 망치면 어떻게하지, 등과 같은 부정적 생각이 끝도 없이 머리를 맴돕니다.

 그리고 인지와 행동의 문제가 일어납니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 회피 행동이 나타나 공부를 충분히 했음에도 빈 시험지를 내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여기에 자존감 저하, 우울, 분노, 그리고 절망 같은 정서적 반응이 이어집니다.

 시험불안이 시험 수행 능력을 떨어뜨리는 이유를 자세히 한 번 알아보죠. 작업 기억(working memory)과 연관해 설명해 보겠습니니다. 작업 기억은 컴퓨터 클립보드처럼 당장 업무 수행에 필요한 정보를 보관하는 걸 말합니다. 정보를 일시적으로 담는 것 외에 업무 수행 순서를 결정하고 실제 업무를 수행하는 뇌의 각기 다른 여러 시스템의 조율 업무까지 담당합니다.

 그런데 시험 불안이 과도하면 작업 기억은 두 배로 업무량이 늘어납니다. 한 편에선 열심히 시험 문제를 풀면서, 다른 한 편에선 시험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 부적절한 걱정을 계속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작업 기억 용량엔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시험 불안이 커질수록 시험 문제 푸는 데 필요한 자원의 양이 줄어드는 결과가 생기는 거죠. 시험 불안이 큰 자녀에게 집중하라고 야단치는 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불안해서 집중력이 떨어졌는데 야단을 치면 불안이 늘어 작업 기억의 효율성만 더 떨어뜨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모로서 자녀의 시험 불안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우선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전해 줘야 합니다. 말로만 과정이 중요하다고 하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녀의 마음을 바꾸려면 부모의 진심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부모 인생관도 재조정해야 하는 간단치 않은 일이라는 말입니다.

 스스로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부모조차 자녀에게는 성취만을 다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하는 대학이나 직장에 갈 수 있을지에 대한 자녀의 불안감은 부모도 똑같이 느낍니다. 그러다 보니 그 불안감을 자녀에게 다시 투사하기 쉽습니다. 부모로서 걱정돼서 하는 이야기지만 자녀의 불안을 두 배로 키웁니다. 자녀 입장에서 보면 나 스스로의 불안에다 부모가 투사하는 불안까지 합해지기 때문이죠. 적당한 불안은 삶의 동기가 돼 공부를 더 열심히 하도록 하지만 시험 불안이 있는 자녀에게 불안을 증폭시키는 것은 이처럼 오히려 공부 수행 능력을 저하시켜 버립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해라”는 말 대신 “인생 별 것 없다, 대충 살아라”고 이야기할 부모는 없을 텐데요. 실제로는 인생 별 것 없다는 식의 염세적 사고에 젖는 게 불안감을 줄이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불안이란 성취의 욕구인 동시에 성취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인생 별 것 없어, 란 생각은 삶의 목표를 낮추는 효과를 가져와 불안감을 낮춰줄 뿐 아니라 역설적으로 작업 기억이 공부에 할당하는 부분을 늘려 성적을 올리게 합니다. 거꾸로 성취 위주의 원하는 결과를 얻어도 더 큰 다음 목표를 재설정하기에 불안감이 끝없이 증폭하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어떻게 자녀에게 “인생 별 것 없다, 막 살아라”고 할 수는 없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는 부모가 많을 텐데요. 맞습니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염세주의 이야기를 한 것이고요. 현실 속에선 인생관을 재조정해 불안을 해소하는 전략을 권합니다. 성취 위주의 인생관을 가치 중심의 인생관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등수만이 아닌 다른 가치에 삶의 목표를 두는 것이죠. 이건 인생이 허무하니 되는 대로 막 살라는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가치 중심의 삶으로 재조정하면 성적 올리려고 멀리 했던 교우관계를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사실 성적만큼 친구와의 우정은 중요합니다. 또 타인과의 따뜻한 감성 소통만큼 좋은 항불안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험불안 대처 전략에 따뜻한 교우관계를 늘리는 게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시험불안을 해소하려고 우정을 나눈다는 건 성취 중심의 생각이죠. 그게 아니라 우정이 소중하기에 친구랑 함께 한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고등학교 학생들, 공부하기 바빠 운동이나 문화 생활은 꿈도 못 꿉니다. 그런데 공부 잘 하는 친구들을 보면 운동이나 책 읽기를 놓치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천재라서가 아니라 내 몸의 움직임을 느낄 때, 봄의 따뜻한 햇살과 파란 하늘을 바라 볼 때, 마음을 촉촉히 젖게 해주는 책 한 권을 읽을 때, 시험 불안이 줄고 공부 효율이 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뇌를 힘으로 밀어부치며 감정을 마구 조정하다 보면 그 업무를 처리하다 결국 공부 능력이 저하됩니다. 뇌를 행복하게 해줘야 성적이 오릅니다. “아들아, 오늘부터 네 주변의 소소한 행복을 챙기며 인생을 즐기렴”이라고 말을 건네면 어떨까요.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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