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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사양」을 주재한 4반세기|엘리자베드 즉위기념일 맞아 들뜬 영국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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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런던=박종희 특파원】좁은 비탈길을 달려오던 소형「트럭」이 흙탕물을 튀기자 그렇지 않아도 시무룩하던 시골 아낙네는 화를 벌컥 내며 차 속의 사람을 보고『이 잡것들아』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운전사는 차를 멈추고『나도 동감이요』하고 미소를 지으며 용서를 구했다. 아낙네는 차가 꼬부랑길을 돌아선 다음에야 그 운전사가「엘리자베드」여왕이었고 옆자리 사람이 부군인「필립」공인 줄 알았다. 여왕 입에서 나왔을 이런 이야기들을 곧잘 전하는 영국사람들 마음에 그려지는 한인간으로서의 모습이란 『폐하』라는 칭호가 주는 엄숙한 것과는 다른 아주 부드러운 것이다.
어질고 부지런하고 상냥하고 우스운 말 잘하고….
3년 전 은혼식 때는 같은 해에 시집가고 장가간, 1백 쌍의 서민 부부들과 함께 즐기자고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불러 이를테면 합동축하 예배를 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전 그의 자서전 집필자의 물음에『TV요? 보고 말고요. 난「코작」의「팬」인 걸요』했다는 걸 보면 이 여왕 천성의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다.
6일 이 여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그의 부왕 뒤를 이어 즉위한지 꼭 22년째 된다고 여기 사람들이나「매스컴」들이 무슨 경사라도 난 듯 들뜨기까지 하고 있는 까닭도 우선은 영국사람들이 그들 여왕에게 느끼는 친근감이라는 데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날부터 올 여름을 통해 연이어 벌어질 갖가지 잔치와 기념행사들이 이 나라 국민들로 하여금 이 여군주의 존재를 한결 더 그들 의식 가까이 느끼게 해줄 것도 분명하다.
6월7일, 그가 공식적인 대관식을 올렸던 날 36개에 이르는 영연방들과 몇몇 공산 국들까지를 포함한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 해군함정들이 영국 남해안에 모여 거창한 해상사열식을 벌이기까지 한다.
물론 오늘의 영국이란 그 화려했던「엘리자베드」1세 때의 영국도 왕년의 대영제국도 또 그가 즉위한 25년 전의 영국조차도 아니다. 인류사상 최대의 제국을 이루어 지구 위에 군림했던 영국은 이잰 열강의 하나로 손꼽힐 만한 처지도 되지 않는다. 「브리튼」이란 자그마한 본토 섬조차 민족적 분리주의 운동들이 고개를 들면서 조각이 날 위험 앞에 맞 부닥쳐 있다.
정신적으로도「처칠」이 상징했던 용기나 슬기가 자취를 감춰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가 감도는 게 오늘의 영국이다. 실상「엘리자베드」2세의 25년이란 지난날의 영광이 계속해 빛을 잃어 온 과정이었대도 괜찮다.
그러면서도 여왕이나 왕실이라는 전근대로부터의 유산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경애에 찬 관심이 여전한 것은 그것이 오늘의 영국이나 세계를 뒤흔드는 변화나 동요 속에서 그와는 대조되는 계속성과 안전성을 상징하고 있거나, 있다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대부분은 아주 현실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서른 여섯을 헤아리는 나라와 영토들이 그녀를 연방이라는 기구의장으로 모시는 좀 기묘스런 현상도 그녀가 아직도 이상하게 지니고 있는 무슨 자력이 있었을 것으로 보아 마냥 시대착오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이「민주왕국」의 왕은 군림만 하지 않는『일하는 왕』으로 손꼽힌다. 국내에 있으면 주로 듣는 역할이지만 지금도 화요일 저녁이면 수상과「버킹검」궁전에서 얼굴을 맞대고 국사를 얘기하고 현실적인 서명을 하는 것이나마 그녀의 손은 시정의 넓은 폭에 미친다. 매회 의회도 그의 시정연설로 막을 연다.
56세 된 부군「필립」공과 29세 17세 13세 터울을 둔 3명의 왕자들, 아직도 생존하는 모 후 등 일가의 주부로서도 현모양처형이라는 게 측근들의 평이다. 외딸「앤」공주가 출가한지도 3년이니까 25세 때 즉위한 젊은 여왕이 할머니가 될 날도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올해 갓 쉰을 넘긴 아직도 정정한 나이다.
11세기 중엽「노르망디」정복 후부터 쳐도 근 1천년, 44대째를 이은 영국왕가의 수명은 어지간히도 길다.
그 비결의 하나가 이미 무너진「유럽」의 딴 왕가들과는 달리 정치적 실권을 일찌감치 서민들에게 넘겨준 데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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