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북극의 장관…「걸리」빙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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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번에는「걸리」빙하를 보기 위해 일행은 바닷가로 걸어갔으나 필자는 이 장엄한 빙하를 좀더 입체적으로 볼 셈으로 혼자 산기슭을 올라가기로 했다. 이 산에는 풍화작용으로 부서진 돌덩이들이 경사면으로 굴러서 쌓여 있는데 살짝 얹혀 있는 돌무더기여서 이것을 디딜 때마다 자주 돌들이 무너지는 바람에 돌과 함께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무릎을 다치기도 하면서 높이 올라가니「걸리」빙하가 보였는데 정말 장관이었다. 수많은 골짜기에 크고 작은 곡 빙하가 내려가며 합쳐지면서 큰「걸리」빙하를 이루고 있는데 폭이 1km쯤 된다. 빙하의 표면에 수많이 터진 금인「크레바스」가 흡사 늙은이의 주름살과도 같이 보인다. 바닷가로 다가선 빙하 끝인 얼굴의 절벽 꼭대기에서 부서진 집채같은 얼음덩이가 바다 위에 떨어져 요란한 폭음을 내면서 높은 물기둥을 이루는가 하면 큰 물결이 생겨 물위에 큰 얼음덩이들이 오뚝이처럼 춤을 추기도 한다.
이번에는 빙하 말단으로 내려가 보니 어떤 사람이 필자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위험한 곳이니 오지 말라고 소리쳤으나 아랑곳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또 한 손에는 빙하에서 주운 돌을 들고 있는데 다름 아닌 50대 가량의 여자였다. 자기 이름은「리셀스트」라고 했다. 이「스피츠베르겐」섬의 지형이며 이「걸리」빙하에 대하여 묻고는 자기의 의견을 말한다.
이 독일여성은 이런 북극에서 동양인, 그것도 귀한 한국인을 만나 세계의 자연을 말하는 것은 뜻깊다고 하면서 이왕 좋은 벗을 사귀게 되었으니 여러 군데를 함께 다니자고 하는 바람에 용기를 얻어 행동을 같이 하기로 했다.
이 여성은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뒤 홀몸으로서 일생을 마칠 생각이지만 자연을 남편처럼 받들며 사는 것이 보람있을 것 같아 이렇게 북극까지 찾아왔다고 했다. 일찍이 고대「그리스」의 여류서정시인「삽포」도 아마 자연을 남편으로 삼는다는 표현을 하지 못하듯이 독일여성에게서 인간적이랄까, 자연적이랄까, 이렇듯 깊은 뜻을 지닌 표현법을 배운 것이 필자에겐 여간한 감동이 아니었다.
이 여성은 또 이「스피츠베르겐」제도만은 호투 적인 인간의 더러운 피가 흐르지 않기를 바랐지만 세계 제2차 대전 때 독일 군과 연합군의 싸움터가 되었다고 아쉬워했다.「나폴레옹」군이「이집트」원정 때「스핑크스」의 코를 대포로 쏘아 떨어뜨렸던 이「히틀러」군의 남포사격으로 장엄하게 솟아 있는 뾰족뾰족한「스피츠베르겐」의 봉우리들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라는 말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리셀스트」여사와 여기저기 답사하러 다니다가 점심때가 되어 배에 돌아왔다. 식당에서 모든 여행자들이 함께 식사를 들 때 저마다 본 새로운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했다.「리셀스트」여사는 드리어 필자에게 좋은 말을 많이 해주었건만 여러 사람 앞에서는 한국인인 김 교수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하면서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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