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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신춘 중앙문예」 희곡부문 당선작|오흥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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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의사:(혼자 나직하게)이게 문제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구나.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다시 생각에 감긴다)(이윽고 결심한 듯)결국 그 방법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겠군.(고개를 저으며)아니 그럴 수는 없어. (턱을 괸다)아무리 그래도 내가 살고 봐야지.
간호원:(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선다) 선생님, 무얼 생각하세요?
의사:(놀라며) 응, 아무 것도 아니야.
간호원: 꽤 고민하시는 것 같은데 무슨 걱정스러운 일이라도 있으세요?
의사: 무슨 일이 있긴 있는데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어.
간호원: 무슨 일인데요?
의사: 글쎄, 아니 그보다도 먼저 한마디 묻겠는데 자기가 살고 나서야 남 생각을 해야겠지?
간호원: 그렇겠죠. 하지만 그건 어째 슬픈 발견인 것 같아요.
의사: (놀라며) 슬픈 발견이라니?
간호원: 그냥 B씨가 한말을 흉내내 본 것뿐이에요.
의사: 나이를 먹어가니까 가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나도 벌써 40이 넘었으니(혼자 생각에 잠긴다) 참 간호원드 여기 들어온지 꽤 오래됐지? 이제 나이도 나이니 만큼 시집갈 때도 됐구.
간호원:(부끄러운 듯이) 아이 참, 선생님도.
의사: 그래 결혼상대자는 있나?
간호원: 네. 하지만 아직 준비가 덜돼서요.
의사: 준비라니, 돈 때문인 게로군.
간호원: 그것도 그렇구요.
의사:(혼잣말로)그것 참 잘 됐군.
간호원: 잘 되다니요?
의사: 재정적인 문제는 내가 책임지지. 내 일을 좀 도와준다면.
간호원: 무슨 일인데요?
의사: 간단해. B씨를 가운데 방으로 불러다 주면 돼.
간호원:(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의사:(혼잣말로)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의사의 방 불이 꺼진다. 잠시 후 환자의 방과 가운데 방의 불이 켜기며 환자의 방에는 간호원이, 가운데 방에는 의사가 동시에 문을 열고 등장. 의사의 손에 무엇인가 들려져있다.
간호원: B씨, 의사 선생님이 부르십니다. 가운데 방으로 가 보세요.
환자B(혼잣말로)하필이면 왜 가운데 방이람. 이 깊은 밤중에. 내일아침에 보면 될걸 가지구.
환자A: (B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럼 내일 아침에 보자구 하지 그래요?
환자B: (A에게 나지막하게)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소? (목소리를 높여)금방 다녀올 테니 먼저 주무시구료.
환자실 불이 꺼지고 B와 간호원퇴장. 가운데 방에서는 의사가 밧줄을 가지고 올가미를 만들고 있다.
의사, 올가미를 가지고 자기 목에 걸어서 당겨본다. 만족한 듯이 미소를 지으며 올가미를 다시 벗겨낸다. 문 두드리는 소리.
의사: (떨리는 목소리로) 들어오세요. 간호원이 들어서고 뒤이어 환자 B가 들어선다. 의사 손에 들었던 올가미를 환자B의 목에 씌워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B, 발버둥친다.
간호원:(놀라서 달려들며) 선생님, 이게 무슨 짓이세요?
의사:(위협적인 목소리로)가만히 있어.
간호원:(주춤한다)
B의 몸이 축 늘어진다.
의사:(B의 시체를 바닥에 뉘고 천천히 올가미를 벗겨낸다)
간호원:(놀라움이 덜 가신 목소리로) 설마 사람을 죽이는 일일 줄은 몰랐어요.
의사:(기죽은 목소리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파산을 면하기 위해서는.
간호원: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있잖아요?
의사:(조금 억양이 커져서) 다른 방법은 없었어.
간호원: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의사: (자신 있는 목소리로) 자살로 위장하면 돼. 아무도 우릴 의심하지 않을 거야.
간호원: 우리라는 말을 쓰지 마세요.
의사:(큰 소리로) 이 사람을 죽인 것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어. 우리를 위한 거였지. 이제 와서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이 사건은 우리 둘이서 함께 책임을 져야 해.
간호원: 책임질 수 없어요.(흐느껴 울며)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계속 흐느낀다)
의사: (간호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후회해도·소용없어. 이제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의 뒤처리야 아무리 울어봤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는 없으니까.
간호원:(소매로 눈언저리를 훔친다)
의사: 이 사람이 돈이 많다는 건 알잖아 게다가 이 사람은 가족이 없어서 뒤탈이 없어요.
간호원: 하지만 후견인이 있잖아요.
의사: 후견인이 바로 이 사람이야. 1인2역을 한 거지.
간호원: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의사: 우연히 알게됐지. 이방에 들어와서 옆방에서 말하는 소리를 엿듣게 됐거든.
간호원:(기쁜 듯이)이체 우리는 잘살게 됐군요.
의사: 그렇구 말구.
간호원:(잠시 생각하다가) 그런데 선생님이 B를 부르신 것을 A가 알잖아요.
의사: 미친 사람의 말을 누가 믿나? 그리고 끝까지 말썽을 부리면 A로 없애버리지. 어차피 병원은 문닫을 거구. 기왕에 사람을 죽였으니 하나를 죽이나 둘을 죽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어.
간호원: 사람은 그만 죽여요.
의사: 왜 겁이 나나? 나두 사람을 더 이상 죽이고 싶지는 않지만 A가 귀찮게 굴면 할 수 없지. 그럼 뒤처리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 간호원은 가서 자지.
간호원: 네. 선생님도 안녕히·주무세요.(문을 열고 퇴장한다)
의사:(혼잣말로) 간호원을 설득하기가 상당히 힘들 줄 알았더니 의의로 쉽게 끝났군.
가운데 방 불이 꺼진다.

<제2장>
때: 다음 날 아침
무대: 1장과 같은 무대. 가운데 방 불이 켜지면 방 가운데 B의 시체가 뉘어져있고 간호원·의사·검시관이 시체주위에 둘러서 있다.
의사:(간호원에게) 옆방에 가서 A를 불러오시오.
간호원: 네.
간호원 퇴장하고 가운데 방 불이 꺼진다. 환자실 불이 겨지면 A가 방 가운데 서 있다.
환자A: (혼잣말로)어째서 B가 아직까지 안 오는 걸까?
간호원: (문을 열고 들어서며) A씨, 안녕히 주무셨어요?
환자A: 왜 밖이 이렇게 소란하죠?
간호원: B씨가 옆방에서 목매달아 자살했어요.
환자A: (놀라며) 네. 아니 그럴 수가.
간호원: 사실이에요.
환자A: 어젯밤에 당신이 불러가지 않았소?
간호원:(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아니요.
환자A: (잠시 생각하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나를 환자취급하지 마시오. 미친척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간호원: (깜짝 놀란다) 네?(잠시 생각하다가) 당신이 미친 사람으로 위장해서 여기에 들어오신데는 무슨 이유가 있겠죠?
환자A: 물론이오.
간호원: (좀 안정된 목소리로) 이유는 묻지 않겠어요. 하지만 어제 사실을 모르는 척 해야 할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의사가 당신을 죽일 거에요.
환자A: 나는 이 병원에서 나가겠소.
간호원: 당신은 한 발짝도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없어요.
환자A: (간호원을 노려보며) 당신도 B를 죽이는데 공모했군.
간호원: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몰라요.
환자A 이제라도 사실을 폭로합시다.
간호원: 그건 안돼요.
의사:(문을 일고 들어선다) (간호원에게)무얼 하고있나? 빨리 오지 않고.
간호원: (황급히)A씨, 빨리 가요.
의사가 퇴장강하고 곧이어 환자 A와 간호원도 퇴장. 환자의 방 불이 꺼진다. 가운데 방 불이 켜지며 의사가 먼저 등장하고 뒤이어 간호원과 환자 A가 들어선다. 모두 잠싯동안 시체를 보고있다.
의사:(더 이장 못 참겠다는 듯 말문을 언다) 참 애석한 일이오.
간호원: 그러게 말이에요. 체가 조금만 주의했더라면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는데.
의사: 내 잘못이오 어젯밤 환자실 돌아보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냥 잠들어 버려서
검시관 두 분 다 너무 책임을 느끼실 필요없읍니다. 정신병원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 아닙니까?
의사: 그건 그렇지만.
환자A" (의사를 노려보며) 어제 당신이 불러가지. 앉았소?
간호원:(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다).
의사: (태연하게)잘못 아신 거요. 난 그런 적이 없는데.
환자A: (간호원에게) 어젯밤 당신이 와서 의사가 부른다고 B를 데려가지 않았소?
검시관(간호원에게) 정말 그런 일이 있었읍니까?
간호원: (A에게 다가가 애원하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제발 모른척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의사가 당신을 죽일 거예요.(소리를 높여) 그런 적이 없는데요. 착각하신 것 같아요.
검시관: (수상하다는 듯이 간호원을 바라본다)
의사: (당황해서 검시관을 보고) 저 사람은 정신병자예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다시 한번 물어보고. (A를 노려보며 위협적인 목소리로) 정말이란 말이오?
간호원: (A에게 작은 목소리로) 제가 한말 잊지 마세요.
환자A: (단호하게) 틀림없어요.
의사: (억양을 높여) 정말이오?
간호원: 제가·한말 잊지 마세요.
환자A: (기가 죽어) 그런 것 같아요.
의사: (의기양양해서) 벌써 흔들리기 시작하는군. 정말이오?
간호원: 제가 한말 잊지 마세요.
환자A: (완전히 풀이 죽어서)글쎄요.
의사: 그럼 그렇지.(검시관에게) 이 사람이 한 말 들으셨죠?
검시관(표정을 누그러뜨리며) 그럼 그렇지. 의사가 환자를 죽일리가 있나?
의사: 그럼 시체를 치우도록 하죠.
검시관: (시체에 다가가 시체를 움직이려다 말고) 이 사람의 눈은 정말 이상한 기분을 자아내게 하는군요. 한번 보세요.
의사: 간호원(한번 힐끗 보고는 자기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한다)
환자A: (머리를 들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는 자살한게 아니에요.
의사: 간호원·검시관(놀라며) 무엇이라구요?
환자A: 그는 자살한게 아니에요.
의사: (흥분해서) 그럼 타살이란 말이오?
환자A: 맞아요.
의사: (더욱 흥분해서) 그럼 누가 죽였단 말이오?
환자A: 이 건물이 죽인 거예요.
의사: 간호원(한숨을 내쉰다)
검시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A를 쳐다본다)
의사: (비웃듯이) 끈이 죽인 거겠지?
환자A: (허공을 보며) 그는 중력의 법칙에 충실하여 지구의 중심을 향해 떨어졌지만 끈이 매달려있던 건물은 중력의 법칙을 배반했어요. 그가 건물을 사랑한 만큼 건물도 그를 사랑하리라고 믿은 잘못 때문에 그는 죽은 거예요. 아니 그보다도 건물을 지은 사람들이 사랑이 없는 냉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무지 때문인지도 모르고. (잠시 쉬었다가)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순간적으로 죽은게 다행인지도 몰라요. 사랑에 실패한. 상처로 끝내 괴로와하며 죽기보다는요.
의사: 간호원(밖으로 나가려한다)
환자A: 잠깐만.
의사: 간호원(멈추어 서며 A를 돌아본다)
환자A: (벽으로 다가가 벽을 만지며) 이 건물은 참 냉정하군요. 이것을 만든 사람들만큼이나 말이에요. 체온도 느껴지지 않는군요.(벽에 손을 댄 채 의사와 간호원을 노려본다)
의사: 간호원(무엇에 이끌린 듯 A를 쳐다본다)
환자A 점점 더 차가와지는군요. 점점 더 싸늘하게 굳어가요. 마치 당신들 몸처럼.
의사: 간호원(몸이 굳은 듯 움직이지 않는다)
환자A: 사랑하기를 끝내 거부한 만큼 당신들은 이 건물의 부속품처럼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해요. 이세상사람들이 모두 서로 사랑할 때까지.
검시관: (놀라며) 어찌된 얼입니까?
환자A: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댓가를 받는 거예요. (B의 시체를 어깨에 걸치고) B씨 여기는 당신에게는 너무나 추운 곳이군요. 이제 이 버림받은 곳을 떠납시다. (방문을 열고 나간다)
검시관: (의사·간호원을 쳐다보다가 황급히 A의 뒤를 따라 나선다)
의사: 간호원은 그대로 서있고 나머지 방에 전부 불이 켜졌다가 모든 방의 불이 서서히 꺼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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