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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사람과 세상] 온유한 투사 조영래, 자신 핍박한 권력도 용서 또 용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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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호 26면

1986년 부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인 권인숙씨를 변론했던 조영래 변호사. 그는 가해자인 부천서 형사 문귀동이 무혐의 처리되자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 법원에 재정신청을 내고 반대 집회를 열었다. [중앙포토]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3개월도 안 돼 전국은 ‘광우병 파동’에 휩싸였다. 그해 6월 대통령은 대(對)국민 사과와 함께 전면 개각을 단행했으나 시위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명박 살인정권 물러가라.” “미국에 국민 생명 팔아먹은 매국노를 처단하자.”

<6> 운동권의 전설 ‘조변(趙辯)’

당시 청와대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는 1960년 4·19가 생각났다. ‘지금이 이승만 하야를 외치던 그때와 같단 말인가….’

광우병 파동은 이렇게 커질 일이 아니었다. MBC ‘PD수첩’으로 불거진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 정부 대응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야당이나 운동권, 일부 언론의 주장과는 본질적으로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당초 평화적인 집회는 날이 갈수록 과격해지고 정치적 투쟁으로 변질됐다. 시위 세력들은 아예 시내 한복판에서 술을 마시고 방뇨를 하며 나이 어린 의경들에게 벽돌과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밤만 되면 광화문 일대는 해방구요, 무법천지로 변했다.

속수무책. 공권력은 마비된 지 오래다. 형사적 처벌로 접근해봐야 범법자들을 오히려 ‘영웅’으로 만드는 격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무너진 법질서를 회복하겠는가? 불현듯 조영래 변호사의 망원동 수재(水災) 소송이 생각났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감정을 절제해 말하던 조 변호사. 늘 긍정적 태도로 ‘구도자’의 모습을 보여 줬다.

고3 때 정학 맞고도 서울대 수석 입학
1984년 9월 1일부터 3일까지의 집중폭우로 서울·중부 일원은 초토화되고 말았다. 특히 상습 침수지역인 마포구 망원동 일대의 피해가 컸다. 수만 가구 주택이 고스란히 물에 잠겼다. 당시만 해도 물난리는 천재(天災)로 인식됐다. 그러나 ‘인권변호사’ 조영래(趙英來·1947~1990)는 다르게 생각했다. “부실 공사를 하고 유수지 물관리를 잘못해 발생한 인재(人災)다.”

그는 대학 후배이자 사무장인 박석운과 함께 망원동 수재민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 서울시와 건설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취재기자와 변호사로 우리는 만났다. 부스스한 머리에 나지막한 목소리, 피워대는 줄담배…. 그것이 조 변호사의 첫인상이었다.

우리는 급속히 친해졌다. 아니, 내가 일방적으로 좋아했다. 연배도 10년 차이가 나고 딱히 공통점도 적었지만 어떤 ‘열정’, 사회를 개선하고 변화시키겠다는 마음이 서로 통해 친해졌던 것 같다.

나는 ‘조영래 팬’이 돼 재판 하나하나를 중계방송하듯 보도했다. ‘언론의 재판권 침해’라고 할 만큼 수재민과 조 변호사 편에 선 일방적인 보도였다. 「망원동 유수지 붕괴사고 “원인은 배수관 균열”」(1985.3.5), 「수해물증 망원동 수문 “철거” 말썽」(1985.4.19), 「망원동 수해는 역시 “인재”였다」(1985.7.26)

‘조변’(조 변호사의 준말)은 자타가 공인하는 수재요, 학생운동의 전설적 리더였다.

경기고-서울대 법대 동기동창인 법조계 인사의 회고담이다. “영래는 공부·학생운동·문화·예술 등 다방면에서 출중했어요. 김근태·손학규 등 동기생 중 단연 발군이었죠. 고3 때 한·일회담 반대시위(1964년)로 정학을 맞고서도 서울대를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고, 고시(사시 13회)도 몇 개월 만에 덜컥 합격해 모든 사람이 부러워했죠.”

‘민청학련사건’ 등 1960~70년대 대형 시국사건 대부분에 그가 관여했다. 덕분에 구속-수감-석방-수배를 이어가며 유신 시절 내내 쫓겨 다녔다. 결국 10·26 이듬해인 80년에야 수배가 풀려 83년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는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왕년의 조영래처럼 정부에 항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운동은 큰 희생이 따랐다. 망원동 수재 소송은 새로운 방식의 대(對)정부 투쟁이었다. 민사 재판을 통한 합법 ‘운동’이라 적어도 양심수를 만들지는 않는다. 대신 경제적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권력은 놔두면 남용될 수밖에 없어요. 민(民)의 견제가 필요하죠.”

3년 뒤 1심 재판에서 승리했다. 조 변호사는 “함 기자 덕도 많이 봤다”며 고마워했다(재판은 90년 이회창 대법관 시절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정의란 어느 한편의 독점물이 아니다”
80년대 중반 민주화 운동이 가열되면서 조영래도 종횡무진 뛰어다녔다. 특히 부천서 성고문 사건 재판 시 피해자 권인숙씨를 위한 그의 변론은 눈부셨다. 당시 나도 가해자 문귀동 형사를 단독 인터뷰하고, 검찰이 그의 거짓 알리바이를 밝혀낸 사실을 취재하고도, 정부의 언론탄압으로 기사화 못한 아픈 기억이 있다.

인권변호사와 신문기자는 ‘동지적’ 관계였다. 우리는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눴다. 조영래를 비롯해 김상철 전 서울시장(작고),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과 강남구 압구정동 광림교회 근처 카페엘 자주 갔다. 홍성우·황인철(작고)·조준희 변호사가 인권변호사 1세대라면 이들은 2세대 주역이었다. 이들을 주축으로 정법회(正法會)가 만들어졌고 훗날 민변(民辯·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으로 이어졌다.

나는 조변에게 당시 군사독재의 실상을 파헤쳐 유명해진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를 소개해 주었다. 그들은 고향(경북 청송), 성씨(趙), 학번(65)까지 같아 금방 의기투합했다. 훗날 은퇴 후 함께 살 공동주택 단지용 땅을 살 정도로 친했다. 둘 다 술이나 유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노래는 좋아했다. 강남구 신사동 힐탑이라는 주점을 자주 가 장난기 어린 로맨스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이 스토리는 나중 TV 단막극으로 방영됐다).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면서 조영래에 대한 나의 호칭은 “조 변호사님”에서 “조 선배”, 마지막에는 “형님”으로 변했다. 내가 몸담고 있던 조선일보에서 노조가 만들어지자 그는 흔쾌히 노조 고문 변호사가 돼 주었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던 민주화가 87년 6·29선언으로 이뤄진 지 3년 뒤, 그는 폐암으로 쓰러져 나이 43세에 타계했다. 90년 12월 어느 날 새벽녘 나는 꿈속에서 그를 보았다.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조영래가 떠난 뒤 우리나라는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갈등과 대립은 더 심해졌다. 상대방이 싫거나, 내 편이 아니거나, 내 이익에 반하면 가차 없이 적(敵)으로 몰았다. 무려 500만 표가 넘는 압도적인 표차로 이겨놓고도 순식간에 무정부 상황에 직면한 이명박 정부가 단적인 예다. 그때 밤늦게 청와대의 적막한 정원을 걸으면서 나는 조영래와 망원동 소송을 기억해냈다. “정의란 어느 한 편의 독점물이 아니다”라는 조변의 평소 지론이 생각났다. 그 지론을 토대로 내 생각을 정리해봤다. ‘80년대가 공권력이 강하고 민(民)이 약했다면, 지금은 정반대다. 일부지만 방종한 민의 행동은 실정법 위반이나, 공권력으론 제어가 안 된다. 그러나 민사 소송은 가능하지 않겠나?… 광화문 주민이나 상인들이 시위단체들의 일탈 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이다.’

시인 안도현은 ‘연탄재’를 함부로 차지 말라고, 너는 누구를 위하여 뜨거워졌던 적이 있느냐고 했다. 그러나 자기 주장이 옳다고 시민들을 위해 꾸며놓은 화단과 잔디밭에 들어가 짓밟고 훼손하는 행동은 올바르지 않다.

법률적으로 시위단체의 배상책임을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나 제동은 걸어야 했다. 지금 행동이 필요하다. 신문 보도를 보니 마침 그런 움직임을 보이는 변호사와 시민단체가 있었다. 개인적 차원에서 그들을 만났다.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사람 이전에 대한민국의 한 시민으로서 이런 공권력 부재 상황은 막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홍보가 문제였다. 주민들이 나서서 시위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인다는 내용이 알려져야 했다. 나는 신문사 지인들에게 전화를 했다.

“부탁이 아닙니다. 우리 공동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합니다.”

신문들은 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소송은 줄을 이었고 마침내 8월 들어 MBC 엄기영 사장이 광우병 사태의 발단이 된 ‘PD수첩’에 대해 “오역·과장이 있었다”고 사과방송을 했다. 이후 시위는 급속히 줄어들고 평화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 업적인 올림픽 개최되자 환호
인생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 중 나는 조영래에게서 진정한 ‘사람’의 느낌을 받았다. 그는 늘 조용했다. 목소리도 나직했다. 사유(思惟)의 시간이 많았다. 재떨이에는 항상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그러나 행동하는 인간이었다. 자기 유익(有益)이 아니라 모두의 ‘공동선(共同善)’을 위해서라면 일신의 안위(安慰) 따위는 그냥 던져버렸다.

조영래를 꿰뚫고 있는 성격적 특질은 무엇일까? 나는 ‘온유(溫柔)’라고 생각한다. 그는 성내지 않고, 오래 참고, 자신을 낮출 줄 알았다. 모진 민주화 투쟁에도 부정(否定) 대신 긍정(肯定)을 이야기했고, 분노(감정)를 표출하기보다 절제했으며, 정의롭게 살면서도 스스로 정의롭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지인이 그를 비난하며 머리에 맥주를 끼얹어도 마치 ‘구도자’처럼 묵묵히 참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험한 시절, 수감되고 고문받고 핍박받았던 조영래는 누구를 증오하거나 독설을 내뱉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오히려 그는 조의를 표하자고 주장했고, 전두환 정권의 업적인 88 서울올림픽이 개최되자, “한민족 5000년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쾌거”라며 행복해했다.

지난날 힘든 시절을 겪었다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이 세상을 미움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한때 자신들의 고난이 영원한 훈장인 양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 심지어 이 땅에서 축복받고 존경받는 위치에 오르고서도 증오의 언어와 감정(感情)을 여과 없이 배출하는 21세기 지금의 모습은 조영래가 그리던 우리의 미래는 아니었다.

분노는 쉽다. 그러나 참고, 용서하고, 관대하게 행동하는 것은 어렵다. 나 스스로 세상살이가 힘들고, 심성이 강퍅해질 때 30년 전 조용히 세상을 바꾸어 나가던 조영래의 온유한 모습이 생각난다. 그 조영래가 지금은 없다.



함영준 조선일보 사회부장·국제부장 등을 역임하고 국민대 겸임교수를 거쳐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 『마흔이 내게 준 선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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