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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2)사상검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47년3월1일-.
즉 3·1절을 맞이하게되자 사사건건 남한 과도정부와 우익민족진영에 대항하여온 좌익진영에서는 서울운동장에서 열리는 우익진영의 3·1절 기념행사와는 별도로 「민전」의 이름으로 남산광장에서 따로 행사를 갖기로 하였다. 조직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전략」 에서였다. 그러나 저들의 뜻한 바와는 달리 대부분의 시민은 서울운동장으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예상한 경찰에서는 시가행진에서 별어질 좌우익의 충돌을 예상하고삼엄하게 경계태세를 폈다.
양쪽 대회장에 모여든 군중은 각기 극도의 흥분에 들떠 서울운동장에서는 보국적 공산도배를 성토하였고, 남산에서는 우익진영을 중상 무략 선전하는데 열을 올렸다.
분위기는 차차 열도를 올려 서로 마주치면 불꽃튕기는 충돌을 하기에 충분한 지경에 이르렀다.
과연 두곳에서 각각 대회를 마친 양진영의 시가행진이 동.서에서 벌어졌고 대열은 위돌점을 향하여 서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윽고 우우진영의 행렬이 남대문근처에 이르자 남산에서 내려오던 좌익연렬과 마주쳤다.
양 진영에서 함성이 울리고 어느 쪽에선가 돌팔매가 날기 시작하였다. 마치 백병전을 연상시키는 대함돌이 일어났다.
이것온 경찰의 발포로 강제해산되었고 이어 공산당에 대한 검거선풍이 일었다.
이윽고 남노당 서울시당부는 각 구당부에 「파업투갱 준비」를 지령하는 투쟁태세에 들어갔다. 이것은 대중의 당으로 조직을 개편한 이후 처음으로 갖는 무쟁인 만큼 생사를 건 중요한 투쟁으로서 조직과 전술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이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가게 된다면 대중당으로서의 남로당의 조직역량을 당내외 에 과시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로당은 3월22일을 기해 전국적인 24시간 단기 총파업을 단행하려 계획을 세웠다. 각급당부는 3월22일에 있을 총파업투쟁에 대비하여 만반의 계획을 짜느라고 긴급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물론 이 3·22파업의 계획은 극비밀리에 진행되었고 이것은 각급당부의 기본 간부들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남로당의 모든 조직은 21일밤 늦게까지 무장태세 작업을 강화하느라고 분주하기만 하였다.
드디어 3월22일 새벽4시가 되자 경전·담도·출판노조등은 파업들입에 성공하였고, 예화국·전신국·건설국도 파업을 단행하였다. 철도청 용산공작창은 상오 8시에 「사이렌」을 울리면서 파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국대안반대투쟁에서 등록을 거부하여 학교에 나가지 않던 「학교세포」들을 총동원하여 시위행진을 강행하였다.
이러한 3·22의 파업투쟁은 남로당으로선 정치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의의가 크다고 단정, 소위 당내의 교양재료로 삼기까지 하였다.
중앙당에서는 이 3·22총파업에 참가한 전국적인 인원보고를 본부에 올리라고 시달하였는데 이 보고에 의하면 공업지대에서 20만3천4백68명, 일반 시민과 상민이 15만6천7백명, 학생 8만명이 참가한 것으로 되어있었다. 이것은 말할것도 없이 터무니없는 가공숫자이며 이러한 조작과 농간으로 민심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과 「전술」의 그늘에는 수많은 무고한 양민과 철모르는 학생이 이용당하고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아 넘길수는 없는 것이다.
조직의 평가와 정치적 효과를 노린 남로당의 전슐이 3·22총파업이라는 형태로 나타나 그 성과를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다.
투쟁의 계기를 만들고 투쟁을 통하여 그 조직을 강화하는 전술은 저들의 정치적 조직적인 성과를 높이는데 큰 구실을 하고 있으며 그 이면에는 순진한 국민 대중과 학생들이 보이지 않는 채찍아래 짓밟힘을 당하고 있었다.
공산당의 보이지 않는 채찍은 어느시기애 가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어 포력을 휘두르고피를 보는 흉기로 그 정체를 나타내게 되고 말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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