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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취재 세계의 여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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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3면

왕실의「백조」로 만족-「모나코」의 「그레이스·겔리」왕비(46)는 아직도 젊고 예쁘다 .세계적 명성을 떨치던 「할리우드」에서 지중해 연안의 소왕국으로 시집온 지 2O년-「바티칸」다음으로 작은 「프랑스」남단의「모나코왕국은 인구3만명도 채 못되는「카지노」와 관광의 나라로 이름높지만 우아한 「그레이스」 왕비의 빛이 오히려 더 강렬하다.
평복의 수녀처럼 조용하게, 그러나 입가에는 소녀처럼 미소를 띠며 초견실에 들어서는 왕비의 모습은 영짐『백조』 속의 공주임에 틀림없었다.
『이렇게 우리나라까지 멀리 와 주셔서 반가와요. 더구나 국복일에 때맞추어 잘 되었군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그레이스」왕비는 말문을 열며 앉았다 (「레이니에」3세의 생일은「모나코」의 국경일) .
『벌써 20년이예요, 결혼한지…. 그걸 한마디로 표현 할순 없지만 참 재미있고 뜻깊고 다양한 생활이라고나할까, 여러모로 보람찬 생애였다고 믿어요.
남편 「레이니에」공과 더불어 수많은 일을 해오면서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고 어려움도 많이 겪으면서 이렇게 20년을 지낸 것 온 참 대견해요….』 왕실과 결혼한 이상 사생활을 꽤 많이 포기해야한다는 것은 이미 각오한바라고 했다.
주말은 자녀와 함께-『오늘같은 국경일 행사를 비롯해서 추수감사졀·부활절 행사에도 신경을 써야하고… 그 밖에 수없이 외교사절들을 위한 만찬회나 「오페라」「발레」삼격도 하고…아이유. 바쁜 일정을 줄줄이 욀 수도 없어요…』
1956년 4월18일 「모나코」 왕국의「레이니에」 3세(53) 와 결혼, 슬하에 세 자녀-딸 「카롤린」(19) , 아들 「알베른(18), 막내딸 「스테파니」(12)를 두고 있는 「그레이스」 왕비에게 아내와 어머니로서 시간적 여유가 있을리 없다.
「모나코」적십자총재· 세계어린이협회의장·「그레이스」왕비재단총재·「모나코」저원「클럽」회장.그리고 국제예술제주도업무등 공식행사만으로도 왕비의 하루는 바쁘다.
『하지만, 이렇게 바쁘게 지내면서도 주말에는 떨어졌던 아이들하고 꼭 함께 지내도록 하고 있어요. 그 애들하고는 만날때마다 언제나 새로운 기분이예요.
그리고 젊은 비결은 바쁜데 있나봐요, 호호‥·)
『어디 ,멀리서들 공부하나요?』
『네, 모두「파리」에 가 있어요. 「카를린」은 「소르본」에서 정치철학을 전공하고 있고…』
『카를린」공주께선 지금 열아홉이던가요?』
『좀 있으변 갓 스물이 됩니다. 참 잘난 애예요. 매우 아름답고 슬기릅고 또 여러방면으로 널리 취미를 갖고 있기때문에 재미있는 성품이지요.
모유먹이기운동 앞장-아마 를림없이 좋은 반려자가 될거라고 믿어요. 우리 모녀간에 의논도 많이 하지만 아마 친하기로는 아빠와 딸이 더 가까운것 같기도 하고요…호호호』그대로 듣고만 앉아 있다간 왕비의 말에 끝려 들 것만 같았다. .영새 『하이눈』같은 곳에서 보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지만 이「차디찬 불길」의 여인은 인자한 어머니의 사랑을 말끝마다 강렬하게 풍기고 있었다.
1971년 「시카고」모성옹호연맹대회에서 「아기에게 어머니의 젖을 먹이자」고 호소한 것온 그 반증이었다. 또한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강도도 이에 못지 않았다.
「레이니에」공을 처음 만난것은 l955년 「칸느」 국제영화제에서 였었던가.
『네, 그래요. 그때 저이를 우연히 만나 처음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 뒤 미국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럼 그 떄 청혼을 하셨나보군요?』『호호…네,그랬어요. 호호…. 』 왕비는 소녀처럼 얼굴까지 살짝 붉히면서 그 때의 「에피소드」를 줄줄이 이어갔다.
그 해「레이니에」공은 미국으로 달려가 구혼하기전에 「그레이스·켈리」 주연영화는 빼놓지 않고 다 보았다. 그 가운데서도 「헝가리」출신의 「프레데릭· 모나아」 제작· 감독의 『백조』에서 「알레기네스」와 열연한「그레이스」공주를 보고 남아의 결심은 움직일 수 없게끔 되었다.
드골과도 면세 담판-이듬해 봄날 『백조』의 주인공은 왕비가 되었다. 1929년 11월12일 미국「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여고시절을 수도원의 성심학원에서 보낸후 열일곱나이에「뉴욕연극예술학교에 진학,「할리우드」 까지 줄기차게 달러간 이 미모의 재원은 1954년 영소 『시골처녀』 에서 「오스카」 상을 받고 은막의 정상에 올랐다.
『아직도 영화에 관심이 많아요. 제가 주연했던 작품은 그 하나하나가 다 특이해서 다 좋아해요. 요즘은 음악과「발레」에 관심을 쏟고 있구요.』총 54만편의 나라 살림을 전적으로 관광수입에만 의존하고 있는 「모나코」의 형편으로 보아 왕비가 뒷전에만 앉아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프랑스」와「세금전쟁」끝에 1963년이후 면세혜택을 받자 2천 6백이 넘는 세계굴지의 대기업과 귀업체들이 본부간판을 여기에 갖다 달았다. 「드골」 대롱령을 직접 찾아가「그레이스」왕비가 울면서 호소한 끝에 얻은 결과라고 했다.
1918년에 맺은 조약으로 왕위계승은 「프랑스」정부의 승인을 받아야하는데 대가 끊기면 1793년의 합병시대로 환원된다. 그래서「암베르」 왕자에 대한 왕비의 사랑은 더욱 끔찍한 것 같다.
한국에 가보고 싶어-『...제 아들은 「스포츠맨」이에요. 축구도 좋아하고 수영도 잘하고 유도까지 하는데. 아버지와는 곧잘 「테니스」시합을 벌이곤 합니다. 장차 취미가 같고 그에게 행복을 안겨줄 규수를 만나야겠는데….」 『백조』의 공주가 벌써 며느리 볼 걱정을 하고 있었다.「그레이스·켈리」의 전성시대는 50년대였다.
『그때 한국과 처음 인연을 갖게 된 셈이죠. 한국동란에 차전했던 어떤 미군전차부대 강병들이 제 이름을 따서 전차에 「그레이스·겔리」애칭을 붙이고는 사진과 편지를 보내지않았겠어요? 별의별 희한한 소리를 다하면서… 호호」『언제 한국을 방문해보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참. 그럴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극동지역에 한번 꼭 가보고싶어요. 늪은 경제성장과 80억 「달러」의 수출보속을 쌓은 한국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모든 발전의 뒤에는 틀림없이 생산공장에 동원된 부녀자들의 노동역이 큰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어요. 「유럽」에서도 그랬으니까요…』
『‥‥‥‥‥』
『하여간, 이렇게 멀리까지 찾아 주어 정말 반가와요. 비행기도 꽤 오래 타셨겠조7』-그의 부드러운 얘기는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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