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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말이 많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금이라는 침묵이나 경망스런 다변은 모두 병적으로 취급될 때가 있다. 필요 이상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 자신은 똑똑하다고 자부할지 모른다.
그러나 말이 많으면 아무래도 문제다. 일반적으로 지속적인 불안 때문에 정서적 갈등이 심한 사람일수록 말이 많아진다. 정신 기능의 기본이 되는 사고나 감정 장애가 다변증의 중요한 원인인 것이다.
스스로의 기분을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조울병 중 특히 조증의 초기 증상이 나타나면 갑자기 말이 많아지게 되며 한편 생각이 병들어 사고의 연상 장애를 수반하는 정신분열병인 망상증에 빠져도 말이 많아진다.
특히 현대인에게 흔한 강박 신경증의 경우도 말을 많이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이러한 기능적인 정신 장애에서 뿐만 아니라 뇌의 기질성 장애인 간질 발작증에서도 갑자기 말이 많아지면서 횡설수설 지껄이게 된다.
자기 자신은 정상적인 회화의 범주에서 거의 벗어남이 없이 말하고 있는 듯 느끼지만 제3자가 듣기에 말의 속도가 빠르고 그 내용이 다양하게 변하여 거의 제지할 수 없을 정도로 수다스러워지는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다변증은 엄격한 의미에서 주관적인 고통을 느껴야하는 자각 증상은 아니다. 항상 타인에 의해서 지적 당하고 발견될 수밖에 없다.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조기 진단은 물론, 치료가 힘든 경우가 많다.
그러나 뇌의 기질적인 병변을 빼놓고는 다변증은 사고의 연상 작용이 너무 과다하거나 강박적으로 같은 생각이 되풀이되거나 혹은 감정이 너무나 억양된 나머지 정신 기능 조절이 부자연스러울 때 나타나는 정신 증상이기 때문에 원인만 알아내면 치료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마음속 깊숙이 숨겨진 불안과 갈등을 끄집어내어 해소시켜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규항 <의박·안양 신경정신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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