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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에 무너진 민정 실습|태국 군사「쿠데타」의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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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방콕=이창기 특파원】6일의 무혈 군사「쿠데타」는 태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예고 되어온 것이「타놈」전수상의 귀국을 빌미로 하여 터진 것이다. 73년 10월의 학생봉기로「타놈」정권이 무너진 이후의 태국은 학생과 농민「데모」의 연속 속에 약체 민간정부가 두 차례의 총선거를 거치면서도 강력한 지지기반을 얻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거기다가 ①공산「게릴라」와 좌익세력의 증대 ②만성적인 빈곤과 빈부 격차 ③부정부패의 만연이라는 태국사회의 3대 암이 어느 한가지도 치유되지 못해 정국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군부「쿠데타」의 위협이 끊임없이 불길한 감시의 눈으로 작용해 왔다. 이밖에도「인도차이나」공산화 이후 미군 완전철수로 인한 주변정세의 변화와「방콕」에만 1백만명이 넘는 실업자군이 있는 등 낙후한 경제사정은 내정불안을 가속시켜 왔다.
학생혁명 이후의 긴장상태는 개혁을 내세우는「타이」전국 학생「센터」(NSCT)와 우파의「타이」전국 직업학생「센터」(NVSCT), 「나와폴」의 대립으로 표면화되었으며「타놈」귀국파 축출문제를 둘러싸고 유혈사태까지 불러 일으켰다.
지난 8월15일 전 독재정권의 부수상「프라파스」의 밀입국으로 62명의 사상자를 낸 좌우학생간의 충돌이 있은 후 9월19일「타놈」이 귀국하여 탁발승이 되자 학생 충돌은 격화됐다. 9월23일「세니」수상이 사표를 냈다가 이번「쿠데타」하루 전에 새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군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타놈」의 추방문제로 반「타놈」학생단체는 9월23일「사남·루앙」광장에서 1만5천 여명의 군중을 동원,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유혈사태의 전주곡은 지방에서부터 시작됐다. 9월24일「나콘·파통」성에서 반「타놈」인민전선회원 2명이 목매달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 사건은 좌파학생의 비위를 극도로 거슬리게 했다. 최근에는 대학교수와 국회의원도 반「타놈」세력에 동조했다.
이런 가운데 좌파 NSCT는 왕실을 모독하는 행위를 저질러 우파학생 뿐만 아니라 일반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5일「타마사트」대학 교정에서 연좌「데모」를 벌인 NSCT는 최근 호주육사 재학 중 귀국한「부미볼」왕의 왕자와 얼굴이 비슷한 이 대학 연구부 학생이 목을 맨 시늉을 했는데 이 광경이 신문에 보도되자「세니」수상 자신이 이례적으로『왕실에 대한 모독』이라고 TV방송을 통해 비난했고 우파학생과 시민 등 7만명이 이 대학을 포위, 유혈극을 벌였고 경찰의 투입으로 사상자가 늘어났다.
특히 우파학생들은 ①반공정책의 고수 ②개각 때 물러난「타막」부내상·「손분」부내상의 재 입각 ③좌파로 지목되고 있는「담롱」상공장관, 「주안」법무장관, 「수린」수상실장의 퇴진 ④「푸에이」「타마사트」대 총장의 구속 등을「세니」수상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세니」수상은 비상 각의를 소집, 계엄령 선포 등을 논의, 정부 입장을 밝히기도 전에 신임「상아드」국방상이 중심이 된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다.
국가개혁위원회를 구성한「상아드」는『태국의 공산화를 막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며 왕실을 보호하기 위해「쿠데타」를 한 것』이라고 이유를 밝힘으로써「쿠데타」정권의 반공노선을 분명히 했다.
친미주의자이며「세니」와 가까운「상아드」는 지난 9월30일 군 최고사령관직에서 정년퇴직, 「세니」에 의해 국방상에 임명되자 하루만에 행동에 나섰다. 태국군부는「타놈」이후의 민정이 약체인 데다「세니」·「쿠크리트」형제수상이 탈미 정책을 수행, 좌경화 하는데 불만을 품고 있었다.
「쿠데타」정권은 태국의 고질인 좌파학생·농민·노동자 등의 반정부 활동을 우선 종식시키는 등 내정에 치중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쿠데타」에「타놈」이 직접 개입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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