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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사설

국정원, 견제받지 않는 권력으로 놔둘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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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은 국정원의 원훈이다. 총성 없는 정보 전쟁에서 때론 목숨을 걸고 국민의 자유를 지켜낸다는 자부심이 배어 있다. 국정원의 현실은 초라하다. 이른바 ‘국정원 직원의 간첩증거 조작 사건’으로 국내정보를 담당한 2차장이 지휘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으며 어제 대통령과 국정원장이 차례로 대국민사과를 해야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유감스럽게도 국정원의 잘못된 관행과 철저하지 못한 관리체계의 허점이 드러나 국민의 심려를 끼쳐드리게 돼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국정원은 뼈를 깎는 환골탈태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또 다시 국민 신뢰를 잃게 되는 일이 있다면 강력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이 진행되면서 국정원의 무명의 헌신성을 믿었던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실망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정보기관이 무명의 권력을 이용해 없는 죄도 만들어내고 없는 증거도 조작해 내는 그런 곳이었나 하는 자괴감이다. 지난 20여 년간 고비마다 도청과 정치개입 문제 등이 폭로되면서 인적·제도적으로 청산과 변화를 거듭해 왔다는 정보기관의 민주화가 고작 이 정도였나 하는 의문도 이어진다. 증거조작은 억울한 범죄자를 양산하는 인권 문제를 넘어서 진실성이 확인된 증거만 엄격하게 채택하는 형사사법체계까지 뒤흔든 국가적 문제이기도 하다.

 국정원은 이제 더 이상 베일에 가려진 자유 수호자로 믿기 어렵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남재준 국정원장을 경질하지 않은 건 이해하기 어렵다. 박 대통령이 남 원장에게 환골탈태의 노력을 주문하고 재발방지의 책임을 맡긴 건 안일한 상황인식이다. 국가 정보기관이 증거조작을 하고, 요원·협조자의 신분을 노출시킨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범죄다. 총체적 책임을 져야 할 남재준 원장은 개혁을 지휘할 자격이 없다. 그는 스스로 사퇴해야 한다.

 이제 국정원 개혁은 국회가 주도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미국은 1970년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정보기관들의 불법적인 정보수집이 문제가 되자 의회가 초당적으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광범위한 법적·제도적 개혁을 이뤄냈다. 2000년대 9·11 테러가 일어난 뒤에도 정보실패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의회는 장기적인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중앙정보국(CIA)에 집중된 정보권력은 분산되고 감시체계는 강화됐다. 그러면서도 종합적인 국가정보능력은 더 높아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정원 개혁이 반드시 국정원 기능을 위축시킬 것이라고 속단할 필요는 없다.

 국정원 개혁의 요체는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견제받는 권력으로 정상화하는 것이다. 국가정보능력이 훼손돼선 안 된다는 원칙도 확고하게 지켜져야 한다. 차제에 국정원 직원과 요원·협조자의 신분을 누설하는 잘못된 행태도 사라져야 한다. 미국처럼 ‘정보요원 신원보호법’ 같은 것을 제정해 이를 어기면 중형에 처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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