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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오랜 기러기 생활로 남편이 가족과 멀어졌다는 주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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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40대 주부입니다. 자녀 교육 때문에 지난 5년 동안 기러기 가족 생활을 하다 최근 귀국했습니다. 돌아와보니 혼자 살던 남편이 애완견에 지나치게 집착을 하더군요. 남편은 내성적이라 친구가 많지 않습니다. 외로울까봐 애완견을 선물로 주고 갔습니다. 남편은 처음에 ‘왜 쓸데 없는 데 돈을 썼냐’더니 지금은 가족보다 애완견이랑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당연히 대화도 애완견이랑 더 많이 하고요. 그런데 황당한 건 로봇 청소기와도 대화를 하는 겁니다. 혹시 우울증인가요. 종교 생활을 하면 나아질지 궁금합니다.

A 로봇청소기와 대화한다고요. 로봇 청소기나 인형 등 비인격체를 인격화해 대화하는 건 혼자 외롭게 사는 싱글족(族)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2012년 통계에 따르면 4가구 중 1가구꼴로 1인 가족이니, 외로움이 세상에 가득 차 있을 것 같군요.

 혼자 사는 건 마음 건강과 몸 건강에 모두 좋지 않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혼자 살면 다 병들고 일찍 죽는다는 거냐”고 발끈하는 싱글족이 있을 텐데요. 싱글이냐 아니냐보다는 마음을 나눌 대상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혼자 살더라도 타인과의 따뜻한 네트워크가 있다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건강을 위해서라도 정을 나눌 대상이 필요합니다. 때론 애완동물이 사람보다 더 낫습니다. 반려동물은 애완동물의 격을 높여 소중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애완동물을 반려동물로 승격시킨 한 해외 동물심리학회의 선언문에는 ‘인간이 인간의 순수함을 잘 전달하지 못해 그것을 대신 전달하는 애완동물을 반려동물로 승격한다’라는 내용이 써있습니다. 인간 대신 우리를 위로해 주는 애완동물, 물론 고마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서로 위로하지 못해 그 기능을 애완동물에 맡긴다는 건 인간의 고독을 반영하는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의 『그로칼랭』이라는 소설에는 길이 2.2m 비단뱀이 파리에 사는 고독한 독신남의 애완동물로 나옵니다. 짝사랑하는 여인과 열정적인 사랑을 꿈꾸지만 현실에서 그를 위로하는 건 그로칼랭이라는 이름의 비단뱀뿐입니다. 그로칼랭은 열렬한 포옹이라는 뜻인데요. 주인공은 그 비단뱀이 자기를 감고서 꼭 포옹해 줄 때 행복해 합니다. 비단뱀의 포옹이라,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요.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는 애완견의 눈을 보노라면 배우자보다 자신을 더 잘 이해해주는 것 같다는 사람을 종종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공감 받을 때 지친 마음의 에너지를 충전받을 수 있습니다. 공감은 상호작용입니다. 애완견이 주인을 물끄러미 쳐다 보는 건 사실 이해하는 행동이라기보다 배 고프니 밥 달라는 식의 본능의 호소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에도 애완견이 주는 힐링 효과는 분명합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답은 연민(憐憫)시스템이라 불리는 항스트레스 시스템에 있습니다. 애완견의 따뜻한 털, 나를 쳐다보는 포근한 눈빛이 연민과 공감의 기억을 자극하는 겁니다. 마치 엄마 배 속에서 포근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거죠. 사람은 혼자 힐링할 수 없습니다. 어떤 대상이 포근하게 자극을 줘 내가 원하는 기억을 되살릴 때, 그러니까 ‘힘든 인생이지만 괜찮아, 넌 잘하고 있어, 힘내’라며 연민시스템을 작동시키는 겁니다.

 심장질환 가진 사람이 애완견을 키우면 심장발작이 줄고 더 오래 산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애완견이 과도한 스트레스를 줄여 심장마저 건강하게 만들었다는 거죠.

 나보다 애완견과 더 많이 대화하는 남편을 보면 당황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완견이 지난 5년 동안 자기 역할을 잘 한 것 같습니다. 남편의 우울증이 걱정된다고요. 사회적 기능을 한번 평가해보세요. 직장 생활이나 대인 관계에 큰 문제가 없다면 애완견과 깊이 우정(?)을 나누는 것만으로 우울증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을까요. 영성(靈性), 즉 초월적 존재와의 만남과 건강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최근 10년간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일부 의학자는 영성이 정신 건강에 해롭다는 주장을 합니다. 예를 들어 우울장애, 정신분열증이라 불리는 조현병 등은 약물치료같은 의료적 접근이 매우 중요한데, 초월적인 힘을 통한 치료만 고집한 나머지 치료 시기를 놓쳐 병이 악화되는 경우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서양 의사들 모두 정신의학에 대한 영성의 영향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최근 연구 결과는 조금 다릅니다. 건강한 영성은 스트레스 대처능력이나 행복감, 긍정성을 향상시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우울증 증상을 약하게 하고 우울증에 걸리더라도 좀더 빨리 치료된다는 거죠.

 왜일까요. 우선 영성은 내 상황을 좀더 긍정적으로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굴곡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려울 때 너무 그 상황에만 매몰돼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면 늪에 빠진 것처럼 더 빠져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나를 아끼는 절대자의 존재를 믿으면 삶을 보다 긍정성으로 바라봐 스트레스 대처 능력을 높여줍니다.

 이유는 또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타인에 대한 사랑과 연민, 그리고 이타적 행동을 강조합니다. 또 함께 만나 공감하라고 권유하죠. 이런 만남은 스트레스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사회적 방어막 역할을 합니다. 어려운 시기를 좌절하지 않고 견딜 수 있게 힘과 용기를 주는 거죠. 의학적 측면에서 보면 건강한 영성이란 결국 강력한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타인과 따뜻한 관계를 맺을 때 건강한 마음을 유지하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또 이렇게 따뜻한 관계를 맺으면 건강한 마음을 넘어 건강한 육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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