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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음해 풍조추방을 위한 캠페인|대의명분의 허구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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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제약회사의 약 광고는 으레「국민건강」을 내세우고 식품회사의 선전 치고「국민식생활 개선」을 외치지 않는 예를 보기 어렵다.
「선거공약만 봐도 배부르다」는 풍자도 있었지만 지난날 정치인이 고 창한 민주주의와 사회정의가 그 몇%만 실현됐더라도 오늘날 우리사회는 낙원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의명분과 현실의 괴리는 이처럼 엄청나다.
한 걸음 나아가 사리와 사원의 동기를 그럴듯한 명분으로 위장하여 남을 모해하고 사회를 혼란시킨 수많은 예를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양 두를 내걸고 구 육을 파는」이런 모해와 사리도모가 아직도 우리사회에 판을 치고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
형편 따라 명분의 깃발을 바꾸면서 정적을, 경쟁자를, 동업자를 뒤에서 또는 옆에서 치고 깎아 내리는 비열한 행위는 아직도 많다.
반공의 이름아래 한때 자행된 밀고·투서·모략의 사회악이나 야당성의 명분으로 정적을 사꾸라로 때려잡은 정계풍토에서 이런 예를 들 수 있고, 서민금융이나 상부상조를 내세운 각종 서민금고나 계가 결국은 사기·횡령·도주로 끝난 수많은 형사사건도 이런 예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다.
과거 이조의 타락한 봉건사회에서 양반계층은 신분제의 명분을 악용하여 무고한 양민을 붙들어 놓고「네 죄를 네가 알렷다」는 식으로 토색질을 일삼은 것은 바로 명분을 내세운 직접적인 강도행위 그것이었다.
오늘날 명분을 앞세운 이런 유의 음해행위는 보다 지능화·기교 화한 것 같다. 보다 우회적이고 법망을 피하는 교묘한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표방하는 대의명분이 과거에 비해 좀더 교묘해지고 교활해졌다고 할까.
또 이런 음해에 동원되는 수단도 다기화 해졌다.
과거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투기·밀고의 방법보다는 매스컴의 악용, 제3기관 또는 행정력의 동원, 유언비어 날조 등 이 음해의 최근 수법이 되고 있는 느낌이다.
가령 창구 일원화란 그럴듯한 논리로 권한과 권리의 독점을 시도하거나, 해당분야에서는 당치도 않은「국제경쟁에 이기기 위한 대단위화」를 들고 나와 경쟁업자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이 경우 관계행정당국을 이용함은 물론이다.
자기에게 유리하면 대단위화를 내세우고 불리하면「소비자 보호를 위한 선의의 경쟁」을 내세울게 뻔하다.
이 작전이 성공하여 창구 일원화나 대단위화가 이루어진다면 파멸한 경쟁상대나 그 작전의 교활 성을 저주할 뿐이지 일반국민은 감쪽같이 속고 말게 마련이다.
보다 악랄하고 음흉한 방법은 매스컴의 활용이다. 예컨대 경쟁업자가 수출로 호조를 보인다면 내수를 외면한다고 헐뜯고, 내수에 주력한다면 수출입국을 망각한 기업이라고 성토하는 것이다. 다만 이런 비방을 적절한 경로로 신문·방송들을 활용해 보도케 함으로써 경쟁상대에게 보다 치명적인 타격을 노리는 것이다.
동업자나 경쟁상대의 스캔들을 조작하여 신문·방송에 오르내리게 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선거 때 라이벌에 대해「첩이 몇이나 된다」「재산이 억대에 이른다」는 따위의 인신공격을 향해 보도를 노린 예는 흔하다. 과거 친일파가 친일파공격에 앞장서거나 행적이 불투명한 정객이 상대방을 오히려 사꾸라로 모는데 선수를 치는 예도 많았다.
시골에 공장을 세우면「고유의 미풍양속이 무너진다」「공해가 자연의 평 온을 깨뜨렸다」고 비방하고 도시에만 공장을 두면 「지역적 편중」과「농촌외면」을 규탄한다.
때에 따라 기업의 재무구조의 건전성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주장하다가 경제성·시장성은 생각지도 않은 채「기간산업투자」여부로만 라이벌을 친다.
따라서 이런 유의 비방·공격은 형편에 따라 명분의 껍데기를 바꿀 뿐「상대의 타도」라는 내심의 진의는 확고부동한 것이다.
개인과 개인간에도 수법은 마찬가지다. 직장 내 라이벌을 꺾기 위해「경비절감을 위한 감원」을 진언하거나 정실인사를 행하는 명분으로「기회균등」또는「업무의 전문성」이 번갈아 제시되는 것이다.
이처럼 명분을 앞세운 음해는 음해 그 자체의 해독도 문제지만 우리 사회의 각종 고귀한 명분마저 타락시킨다는 데도 문제가 있다.
애국애족·사회정의라든가 자유니, 반공이니, 사람이니 하는 명분보다 더 높은 명분이 있기 힘들지만 오늘날 젊은이들의 일상대화 가운데「애국 좋아하네」「사랑 좋아하네」라는 비양거림이 많은 것은 그만큼 이들 명분이 지금껏 악용된 경험이 많다는 반증일수 있다.
말하자면 애국의 명분아래 이뤄진 일이 결과적으로는 사리의 도모였거나「사랑」의 많은 속삭임이 실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건전한 사회, 양식이 지배하는 사회를 이룩하는 필수의 조건 속에는 이 명분을 앞세운 음해의 시정도 반드시 포함돼야 할 것이다. <송진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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