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얼 경제사] 인도 근대화의 상징 … 실제론 영국 자본가 배만 불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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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호 20면

루돌프 스보보다(Rudolf Swoboda), ‘기차를 힐끗 보며’, 1892년

의문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는 그림의 왼쪽 하단에 나와 있다. 각이 진 기다란 물체는 다름 아닌 철로의 일부다. 주인공들은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던지듯 화가인 루돌프 스보보다는 철로를 그림의 한 귀퉁이에 살짝 그려 넣었다. 제목은 ‘기차를 힐끗 보며’라고 붙였다. 화가는 어떤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했을까? 자세히 보면 인물들의 표정이 차분하면서도 따뜻하게 그려져 있다. 한낮의 뙤약볕 아래에서도 이들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밝은 긴장감이 엿보인다. 마치 배경을 이루는 시골 풍경으로부터 근대적 공간을 향해 나오는 사람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화가는 새로 철도가 부설된 19세기 말 인도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③ 비자발적인 세계화, 인도 철도

이런 추측이 얼마나 맞을지는 화가의 개인사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스보보다는 1880년에 이집트로 건너가 많은 그림을 그렸고, 그로 인해 ‘동방전문가(Orientalist)’라는 명성을 얻었다. 스보보다는 1886년에 인도로 그림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때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여행 경비 300파운드를 제공했다. 화가는 그 대가로 여왕에게 스케치 작품들을 헌상하기로 했다. ‘기차를 힐끗 보며’는 이 스케치 목록에 들어 있지 않은 독립적인 유화였다. 화가가 대영제국의 궁극적 상징인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그림을 요청받았다는 사실은 그가 식민지 인도를 어떻게 표현하고자 했을지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다. 그는 기차를 기다리는 인도인 가족의 모습을 통해 새로운 문물이 인도에 근대화라는 밝은 미래를 가져다줄 것으로 묘사하고자 했다.

실제 역사에서 철도는 인도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세계경제사에서 철도의 등장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산업혁명은 인력, 축력, 풍력을 이용하던 기존의 에너지 사용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새로운 에너지원인 석탄의 사용은 생태계를 직접 압박하지 않으면서도 생산력을 급증시킬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철도는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새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경제를 대대적으로 변화시킨 신기술의 총아였다. 철도는 먼 지역들을 연결시켜 사람과 상품과 원료가 쉽게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새로운 지식, 기술, 제도도 철도를 통해 빨리 확산될 수 있었다. 즉 철도는 근대적 기술 진보의 소산이자 사회 구성원들이 근대화의 이익을 누릴 수 있게 만든 핵심 수단이었다.

액슬 헤이그(Axel Haig), ‘봄베이의 대인도반도 철도 터미널과 행정관청’, 1878년

놀랍게도 20세기 초 아시아 전체에 건설된 철도의 80%가 인도에 놓였다. 액슬 헤이그가 묘사한 봄베이(뭄바이) 철도 터미널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철도는 문명, 미래, 진보, 선진화와 동일시되곤 했다.

그러나 스보보다와 헤이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이미지처럼 인도의 역사에서 철도가 꼭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인도의 근대화는 부진했고, 인도인이 누린 경제적 이득은 미미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근본적인 이유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철도 투자에 대해 인도 식민지정부가 일정한 수익률을 보장하도록 강요했다. 각 노선이 연 5% 미만의 수익률을 기록할 경우 차액을 보전해 주도록 제도를 짰던 것이다. 이 제도는 영국 투자가들이 수익성이 낮은 외딴 지역에도 철도를 부설하도록 하는 인센티브로 작용했다. 게다가 철로 건설, 철도 차량 제작, 연료 공급, 철도 운영의 핵심 부분을 영국 기업들이 독차지했으므로 인도인들에게 많은 이익이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비현실적이었다. 1900년에 수익률이 5% 미만이어서 인도로부터 보전금을 받은 노선이 무려 전체 철도의 70%에 이르렀다.

사실 인도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영국과의 악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까지 인도는 중국과 더불어 세계인들이 소비하는 물건을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였다. 인도의 최대 수출품은 면직물이었다. 유럽 귀족들이 사들인 최고급 직물부터 카리브해에서 노역하는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의 거친 작업복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수준의 면직물들이 인도인의 손에 의해 생산되고 수출되어 국고를 살찌웠다. 영국을 포함한 유럽의 중상주의 국가들은 면공업을 발전시켜 인도산 면직물 수입을 대체하려고 노력했지만, 경쟁력에 큰 차이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굴제국이 영국의 침탈을 받아 몰락하면서, 그리고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전개되면서 인도 면공업은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영국은 17세기에 동인도회사를 내세워 인도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경쟁국인 프랑스를 물리치고 벵골의 지배권을 확립함으로써 인도 식민지화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영국은 본국의 면공업 육성을 위해 인도의 면공업을 압박하여 쇠락의 길로 몰았다. 18세기 말부터 영국 북부 랭커셔 지방을 중심으로 면공업이 급성장하면서 영국은 마침내 세계시장에서 인도를 몰아내기에 이르렀다. 19세기에 영국은 인도 각지의 토후세력들을 분열시켰고, 마침내 1857년 세포이의 봉기를 진압함으로써 인도를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인도는 더 이상 면직물 수출대국이 아니라,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영국을 위해 원료인 면화를 공급하는 식민지로 전락했다.

작자 미상, 인도 파트나 시의 아편창고, 1882년. 수확된 아편은 무게 900g의 둥근 덩이로 만들어졌는데, 이 창고에만 30만 개의 아편이 저장되었다.

영국은 19세기 들어 인도로부터 또 다른 도움을 얻었다. 이번에는 아편을 통해서였다. 영국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편 수출의 확대를 기획했는데, 중국에 팔 아편을 생산하기에 인도는 최적의 생산지였다. 이후의 역사는 잘 알려진 대로 아편전쟁을 통한 영국의 중국 침탈과 개방으로 이어졌다. 서구 열강에 의해 이루어진 강제적 세계화의 또 다른 사례였다.

영국에 있어서 인도는 얼마나 큰 경제적 가치를 지녔던 것일까? 19세기 말~20세기 초 영국은 유럽 대륙과 북아메리카에 대해 심각한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1910년 대미 적자는 5000만 파운드, 대유럽 적자는 4500만 파운드나 되었다. 이를 해결해 준 것이 아시아로부터 유입된 자금이었다. 영국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1300만 파운드의 흑자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인도에는 무려 6000만 파운드의 흑자를 보였다. 그런데 인도가 영국산 제품을 계속 소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중국으로부터 얻은 아편 판매대금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영국은 아편을 통해 중국과 인도에서 동시에 막대한 이익을 취했던 것이다.

보통 서구의 역사책에서 이 시기는 세계적으로 무역과 자본 투자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호시절’로 묘사된다. 그리고 여기에 영국의 역할이 컸다고 설명된다. 최대 경제국이었던 영국이 일부 국가들에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다른 국가들에는 유사한 규모의 무역흑자를 기록했기 때문에, 세계 경제가 글로벌 불균형(global imbalance)의 문제를 피해 원활하게 작동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균형의 이면에는 오늘날엔 정당화할 수 없는 인도 식민통치와 아편 수출이라는 정책이 도사리고 있었다.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세계화와는 달리 강제적인 세계화는 손해를 가져오기 십상임을 인도의 사례는 여실히 보여준다.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제사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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