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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부활절에 돌아보는 우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70호 27면

영화 ‘로닌’을 보면 어떤 작업을 위해 모집된 전직 스파이들이 서로의 무용담을 나누는 중에 적의 심문에 견디는 법에 대해 논쟁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은 심문을 무한정 견딜 수 있다고 자랑하는 동료에게 주인공은 “사람은 지속적인 압박에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다”고 반박한다. 그 말을 듣던 다른 동료가 묻는다. “당신은 어떤 압박을 받았기에 굴복했느냐?” 주인공이 대답한다. “내게 메뚜기 요법을 쓰더라.” “메뚜기가 뭐냐?” 주위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져 묻는다. 어떤 악랄한 고문법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랬더니 주인공 왈, “메뚜기란 진과 브랜디, 크림 드 민트를 섞은 칵테일이야.”

농담이더라도 뼈 있는 농담이다. 사람은 자신의 신의와 절개를 지키는 것에 대해 의외로 빨리 타협을 하더라는 지적이다. 온갖 고문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면 아직 칵테일 대접을 받을 수 있을 때 빨리 타협하는 게 똑똑하지 않겠느냐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남들은 그럴지라도 저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 상황이 닥치니 베드로의 배짱은 온데간데없고 계집종의 말 한마디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이후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베드로는 슬피 울며 후회를 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도 베드로는 새벽에 닭이 울 때마다 일어나 울면서 자기의 과오를 회개했다고 한다.

베드로만 그런 게 아니다. 종교를 떠나 모든 부분에서 우리의 정신적 자산은 의외로 밑천이 금방 떨어진다. 굳이 악랄한 고문 방법을 쓰지 않아도 칵테일 한 잔에 자신의 신념을 타협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조국이나 직장을 배반하고 기밀을 팔아넘기는 자들이 무슨 사상이나 신념 때문이 아니라 돈에 매수돼 그러는 것처럼.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배신하고 KGB에 비밀을 팔았던 올드리지 에임스도 자기의 배신은 매우 평범하고 작은 이유 때문이었다고 했다.

어렸을 적 어머니는 성미가 급한 내게 “화가 날 때마다 하나에서 다섯까지를 천천히 세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대로 따라 했다. 다만 둘에서 넷까지를 생략하고 하나에서 곧바로 다섯을 셌을 뿐이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것을 미리 알고 계셨지만 그런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찾으셨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룩한 척하지 말고 생긴 대로 살아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 베드로는 네로의 핍박이 닥쳤을 때 로마에서 도망가다가 노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마음을 다잡고 로마로 되돌아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다른 제자들과 많은 성도들도 기꺼이 생명을 바쳤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신앙에 뭔가 있었으니까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추론이 가능하다.

누군가에게 처음부터 목숨 바쳐 충성할 것을 요구하지는 말라. 나도 베드로처럼 겁을 먹고 도망갈지 모른다. 다만 그 이후가 중요하다. 베드로도 한 번 도망갔지 두 번 도망가지 않았다. 그 사이에 뭔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은 일단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의롭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거기에서 진정한 신앙이 시작되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힘도 얻을 수 있게 된다.



김영준 예일대 철학과와 컬럼비아대 로스쿨, 훌러신학교를 졸업했다. 소망교회 부목사를 지낸 뒤 2000년부터 기쁜소식교회 담임목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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