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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담배는 위험성 알고 선택하는 기호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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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담배가 각종 질병을 유발한다는 말은 이제 상식으로 통한다. 그동안 의료계는 담배 많이 피우는 사람이 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수많은 실험결과와 데이터를 제시해왔다. 하지만 그 정도의 근거로는 담배회사로부터 배상을 받기에 부족했다. 법원은 훨씬 엄밀한 증명을 요구했다.

 15년간 진행된 흡연피해자 소송에서 원고들은 ▶담배는 위험한 물질이고 ▶그 위험성을 숨기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았으며 ▶담배 때문에 암에 걸렸다는 점을 입증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KT&G가 스스로 연구했거나 외국에서 입수한 자료를 공개하라고 압박하고, 외국에서 승소(합의) 소식이 들려오면 그 자료를 구해 재판부에 내기도 했다.

 특히 항소심에서 흡연 피해자 7명 중 4 명에 대해서는 인과성을 인정하는 듯한 여지를 남겼기 때문에 원고들은 더욱 대법원 판결을 기대했다.

 대법원은 10일 내놓은 최종 결론에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우선 담배를 피우면 암에 걸릴 확률이 현저히 높아지는지 여부를 각각의 암별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관계가 깊다고 인정받는 폐암과 후두암조차 종류별로 차이가 있다는 게 대법원 판단이다. 폐암 가운데 소세포암과 편평세포암이 흡연과 인과관계가 강한 암으로 꼽혔다. 피해자 7명 중 3명은 이 벽을 넘지 못했다.

 두 가지 암에 걸렸다고 무조건 배상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 다른 원인이 아니라 흡연 때문에 그 암에 걸렸다는 점도 추가로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담배가 아닌 다른 원인으로도 이 암에 걸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원고 측 정미화 변호사는 “조건을 너무 까다롭게 해서 다른 소송에도 영향을 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담배가 ‘위험한 제조물’인가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생각을 달리했다. 기호품이라는 이유에서다. 재판부는 “담배를 처음 피우거나, 앞으로 계속 피울 것인가는 모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며 “담배에 발암물질이 들어 있고 중독 증세가 나타나더라도 기호품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의 안전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심리적 안정을 얻기 위해 담배를 피우는데 니코틴을 빼면 이런 효과가 없으므로 더 안전한 제조 방법은 없다”고 못 박았다.

 위험성을 알리는 자료를 공개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다른 담배회사의 제품보다 특별히 더 위험한 제품을 만든 게 아니라면 공개할 필요성이 없다”고 밝혔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 이후 종종 거액의 배상 판결이 나오기도 한다. 징벌적 배상 때문이다. 2009년 연방대법원은 한 흡연자가 제기한 소송에서 필립모리스사에 7950만 달러(약 800억원)를 배상하라고 판결을 확정했다. 좀 불리해진다 싶으면 담배회사들이 배상에 합의하기도 한다. 1990년대 후반 50개 주정부가 담배회사를 상대로 진행한 대규모 소송전에서도 담배회사들이 25년간 총 230조원을 물어내는 데 합의했다. 이번 소송을 처음부터 이끌어온 배금자 변호사는 이 같은 사례를 들며 “한국 대법원의 판단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내에서도 건강보험공단이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기존의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과는 달리 흡연과 폐암의 인과관계를 입증할 보다 많은 증거와 자료들을 제출할 수 있어 이번 대법원 판례와 다른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는 분석이다. 정미화 변호사는 “기존 소송에서 KT&G는 영업비밀을 이유로 대부분의 자료를 피해자 측에 제공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미국에서 진행된 소송에서 자신들의 자료를 모두 공개해야 했던 외국 담배회사들이 공동 피고에 포함된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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